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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15 03:09
광해군의 궁궐덕후기질에 관해서 건축사쪽에서는 정통성의 확립으로 보는거같던데
사학계 쪽에서는 미묘하게 다르게 미신적인 부분과 왕권강화라고 보고있나보군요! (물론 건축사 관련 논문을 몇편밖에 몰라서 전반적인 설인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13/02/15 08:21
잘잘못을 떠나서 당파 싸움은 조선시대 중반기 이후부터는 내내 있었던 거니까 그 자체만으로 광해군을 까긴 좀 힘들테고, 인목왕후를 폐한 사건이 정말로 유교 세력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준 것이냐 아니면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고 단순히 힘싸움에서 밀린 거냐 이걸 판단해야겠군요.
13/02/15 11:19
당연히 힘싸움에서 밀린 거지요. 문제는 힘싸움에서 밀린 원인입니다. 당파싸움은 조선시대 내내 있었고 언제나 피를 불렀지만, 이긴쪽이 욕을 먹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냥 정치적 힘싸움에서 이긴 거니까요. 훈구파도 서인만큼 욕을 먹지 않아요. 그런데 광해군에 관련해서만 그 원인을 자꾸 서인에게 물으며 비난을 합니다. 또, 왜 광해군이 정치적 힘싸움에서 밀렸나는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원인은 그냥 서인이 강하고 나쁜 놈들이라서 인데. 윗 글에서 볼 수 있듯 영화 광해와 다르게 서인은 다수파가 아니었고 북인은 소수파가 아니었습니다. 광해군은 왕이 된 그 시점부턴 상당히 커다란 권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국정적으로도 반대파를 얼마든 묵살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실제 광해군이 추진하려고 한 일 중 실패한 일은 천도 하나 정도 뿐 없습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들 모두 다 죽였고 대동법 확대도 본인이 막았고 궁궐공사도 실컷했습니다. 소수파도 아니고, 하고 싶은 거 다 했던 광해군이 대체 왜 15년만에 정치적 힘을 잃고 서인에게 몰락한 것일까. 전 그 원인은 서인이 아닌 광해군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더군요.
13/02/15 12:34
제가 역사를 잘 모르긴 합니다만, 훈구파는 최소한 건국과 나라 질서 확립에 기여라도 했지 서인은 별로 한 일이 없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광해군을 딱하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서인 세력은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더라구요.
13/02/15 12:39
건국과 초창기 제도 확립은 관학파라 불릴 만한 초창기 지배집단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학파가 창출한 초창기 제도는 훈구파가 망처놨고요. 그걸 재정립한 조선후기 제도개혁을 주도한 건 사림계열이고, 특히 서인층이 주도한 바가 있죠. 의외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장에 대동법만 하더라도 서인계열이라 속하는 인물들이 주도했습니다.
13/02/15 12:42
음.. 저는 관학파 = 훈구파로 생각하고 댓글을 단 것인데, 생각해보니 훈구파라는 사람들은 그냥 관학파의 자손들로 태어나서 하는 일 없이 받아먹기만 한 친구들이겠군요.
13/02/15 12:55
그렇게 광해군의 공으로 치적받는 대동법을 발전하고 완성시킨 게 서인입니다.
특히 대동법의 아버지인 김육은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가 서인반정으로 다시 등용된 케이스이지요.
13/02/15 09:45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반정의 주 모토중 하나가 폐모살제 였죠. 근데 역사상으로 보면 폐모살제는 흔하디 흔했습니다...당장 태종 이방원만 보더라도 직접적으로 폐모는 하지 않았지만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능을 묘로 강등하고 석물을 가져다가 광통교를 만들었습니다...제 동기중에서 광해군을 파던 친구가 있었는데, 서인세력을 가루가 될때까지 까더군요.
13/02/15 10:05
반정명분은 폐모살제, 민생파탄, 외교문제의 세가지입니다. 그런데 외교문제는 그냥 대내용이고(대외적으로는 차이가 보이지 않음)결국 도덕적 이슈인 폐모살제와 민생파탄이 최대 이유였죠. 그리고 여기에 대해 광해군은 할말이 전혀 없습니다. 실제로 두가지 다 사실이니까.
조선후기 제도사라던가 이것저것 파 봤지만, 현제까지의 제 결론을 말하자면 광해군은 좀 더 까도 되고, 더 많이 까야 하며, 서인세력은 너무 과하게 까였습니다. 자기 애비만 못하다 여겨집니다. 광해군은.
13/02/15 12:37
복구해야 할 타이밍에 복구 대신 궁궐만 지어댔고 그걸 위해 참 이것저것 망처놨죠.
전후복구에 중점을 두고 제도사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13/02/15 13:42
폐모살제라고 예를 든 태종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거말고 또 다른 예가 있나요? 적어도 우리나라역사상 조선에서 폐모상제는 절대 흔하디 흔하지 않았습니다.
13/02/15 12:23
저에 대한 이야기를 쓰셨군요 헤헤 =_=
광해군의 공과는 뭐 개인마다 다 다를테지만, 그냥 개인적으로 안쓰럽습니다. 어머니는 2살인가 3살인가에 죽었고(그것도 그냥 후궁신분으로), 세자책봉은 임란전까지 받지도 못하다가 임란 터지자 아버지가 '니가 세자니깐, 인제 알아서 해라' 하면서 세자 즉위식도 못한채 세자 즉위, 임란 때는 일국의 세자로 황해도 등을 뛰어다니고, 임란 끝나고 살만해지려나 했더니 영창대군 등장 ㅡ.ㅡ;;;; 겨우겨우 왕위에 오르고나서는 당파싸움에 시달리다가(그나마 자기를 지지하던 대북은 소수파), 형 죽이고 동생 죽이고 어머니를 폐모시켜야하는 안타까운 상황, 결국 반정에 의해 폐위당했는데 모진 목숨은 병자호란 직후까지 살다가 세상 하직......그야말로 파란만장하네요 ㅡ.ㅡ;; 개인적으로는 광해군 시기 이후에 조선의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서인세력을 워낙 부정적으로 보는지라..(너무 경직되있어서) 그냥 더 안쓰러워지는 광해군입니다. 폐위만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 군주일텐데...
13/02/15 12:34
시켜야 한 게 아니죠. 자기가 의도한 거지. 솔직히 자업자득으로 보입니다.
대북이 소수파라는 것도 이게 참 애매한 것이, 정인홍의 자충수(오현종사와 회퇴변척)로 스스로를 배타적 소수파로 만든 것이지 원래 소수파는 아니죠. 광해군의 지지층은 초기엔 폭넓고 두터웠습니다.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으로 대표되는 초기 삼정승은 능력과 인품을 모두 인정받은 인물들이며, 동시에 각각의 당파를 대표하는 거물들이기도 합니다.(이원익은 남인의 수장격, 이덕형은 북인인 이산해의 사위라 범북인계열이라 할만하고, 이덕형은 저 성격 더러운 정철과도 나름 잘 지낸, 서인계열 인물이죠. 그리고 이들 사이는 다들 괜찮았었고.) 광해군 초기 정권은 이러한 범당파적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잘해야 유영경계열 정도만이 반대파였습니다. 광해군의 지지층이 줄어든 건 자기 손으로 자기가 깎아낸 결과입니다. 폐모살제도 그렇죠. 솔직히 임해군이나 영창대군이나 광해군 즉위 초창기의 지지층을 생각하면 광해군의 왕권에 크게 영향을 주기 힘들었습니다. 임해군은 너무 막장이고, 영창대군은 너무 어렸죠. 인목왕후도 정치적 적수가 되기엔 영 아니었고. 그걸 억지로 처서 반정명분에 더해 지지층도 이탈했으니...
13/02/15 12:38
이번에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광해에 대한 평가는 sungsik님이나 나이트해머님과 비슷합니다. 분명 광해는 능력도 있었고 불우한 여건만 아니었다면 더 잘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광해의 실패는 자신 스스로의 자업자득이라고 봅니다. 역사를 찾아보면 광해보다 더 불리한 여건에서 시작한 군주도 많습니다만 그들 모두가 권좌에서 축출당한것도 아니고 그런 가운데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도 얼마든지 있죠. 그리고 광해는 과거엔 몰라도 지금은 실질 이상으로 과대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다지 안쓰러울건 없는 것 같네요.
13/02/15 13:00
개인적으로 광해는 진짜 똑똑한 인물이었다 생각합니다.
가끔 실록의 광해군 일기에서 보이는 발언을 보면, 정말 똑똑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런 똑똑한 인물이 아집과 독선에 휩싸이면 어떻게 되는 가에 대한 것 역시 동시에 볼 수 있지요.
13/02/15 13:40
똑똑하고 머리는 좋았지만 자신의 한계로 인해 그 역량을 못발휘한건 선조나 광해군이나 아버지아들이 같네요.
선조는 질투와 의심 열등감에 사로잡혔고 돵해는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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