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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03/06 00:53:40
Name 김연우
Subject 엄마 전등, 아기 전등
        
처음이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번 시즌 MSL에 대한 이윤열의 마지막 경기를 지켜 보면서, 이미 초반부터 짙어져가는 패색이 서서히 구체화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캐리어에 탱크가 터져나가는 장면을 보기 시작하면서, 한방 병력이 볼품없는 한줌의 패잔병들로 바뀌어가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이승원 해설의 말이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 이윤열이 배럭을 띄웠던 말던 무슨 상관인가. 마린 6마리를 뽑았건 7마리를 뽑았건 무슨 상관인가. 지금 이윤열이 지기 직전인데, 지금 이윤열이 안타깝게 패배하기 직전인데!



예전 어느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한번 했었다. 나는 프로게이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를 좋아하는 것이구나,하고. 분명 프로게이머가 하는 것이 스타크래프트이고, 스타크래프트를 보여주는 이들이 프로게이머이지만, 나는 어느순간 이 둘을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어느순간 나는 프로게이머가 아닌 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철새빠, 또는 본좌빠라 불리는 무리에 나는 속해있다. 내가 프로게이머가 아닌 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이란걸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 선수'의 플레이가 아니라, 그 선수의 '플레이'였으니까. 더이상 그 선수의 '플레이'를 볼 수 없으면 다른 선수의 '플레이'를 볼 뿐이었다. '그 선수'를 보는 팬들과는 달리.

그 선수가 아닌, 그 선수의 '플레이'를 좋아하기에, 나는 게임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본좌들을 장난 아니게 좋아하는 김동준 해설 역시 마찬가지인듯 하다. 그래서 난 듣보잡 선수도 좋은 '플레이'를 하면 당장 그 듣보잡 선수를 좋아하게 있게 된다. 그 듣보잡이 내가 원래 좋아했던 누군가를 이긴다 해도 아무 상관없다. 더 좋은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는 듣보잡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 스스로 동화되고 내 스스로 몰입했던 게이머, 즉 내가 스타 이전에 '좋아했던' 게이머는 있었었다. 바로 박정석이다. 하지만 더이상 TV에도 보이지 않는 이에게 정을 주기는 힘들었던 것인가. 나는 더이상 게이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스타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그가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고 당대 최강 이영호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자, 나는 스타가 아닌 게이머를 좋아하는 이가 되어있었다. 그 선수의 '플레이'가 아닌 '그 선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 그 선수'를 좋아하면, 더이상 OME란 말을 사용하질 않는다. '선수'를 볼 뿐이지 플레이를 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OME면 어떻다는말인가. '그가 이기고 있는데!'. 플레이가 훌륭하건 무슨 상관인가. '그가 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경기가 끝나자, 사람들은 패인을 이야기한다. '이러이러 해서 진거야.' '이거이것만 했으면 이겼는데.' 같은 말이지만,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이유는 묘하게 달라진다.
'스타'를 좋아하는 이는 그 플레이를 분석하기 위해 경기의 패인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생각 저러한 생각들을 말하며 즐거워한다. 그의 즐거움은 진심이다.
'게이머'를 좋아하는 이는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하기 위해 경기의 패인을 이야기한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단지 가슴 저미는 아픔에 괴로워할 뿐이다.








토이스토리 등 여러 3D 애니메이션 히트작으로 유명한 PIXAR 사가 있다. 처음 회사가 만들어지고, PIXAR는 자신들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 위의 두 전등이 등장하는 짧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상영이 끝나고 자신들에게 쏟아질 여러 기술적 이슈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던 PIXAR의 직원이 받은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저 전등이 엄마전등 입니까?"







누가 왜 이겼고, 그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했으면 이길 수 있더라. 이러한 플레이에 대한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도가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중요한건 이윤열이 졌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전개된 기술적인 분석들은 이윤열의 패배가 결정된 그 순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표현되기 위해 어떠한 밑바탕이 그려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지배하는 '감정'이다.





묘한 생각이 든다. 엄재경 해설은 왠지 해설위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약 백년전 어두 컴컴한 밀실 안에서 차르르르르 조용히 흑백 화면을 보여주는 영사기, 소리가 나지 않는 이 무성 영화를 틀어주며 혼자 주인공이 돼었다, 또는 악당이 돼었다가, 또는 여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변사(辯士)'가 생각난다. 북치고 장구치고, 대사도 외웠다가, 노래도 불렀다가, 그러면서 장면에 대한 설명도 하는(아아, 심순애는 다이아반지를 받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그 변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타임머신에 들어간 게이머들은 더이상 말하지 못한다. 경기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인터뷰를 통해 그들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모습만 보여주는 무성 영화의 대상이 된 그들에게, 해설진들은 변사가 된다. 해설진은 선수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 말해주고, 팬들의 안타까움 심정을 또는 환희를 주먹 불끈지어 말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감정이 있다. 이야기에는 사실도 있고 사건도 있지만 희노애락 역시 있다. 그를 좋아하는가, 그의 플레이를 좋아하는가. 그의 승리를 기뻐하는가 기뻐하지 않는가. 그 차이는 환타지와 무협지스런 별명이 아닌, 플레이가 아닌 그 선수에 몰입하였는가 몰입하지 않았는가로 결정나는 것 아닌가, 싶다.



* 주 : 혹시 기분 상할만한 글이 아닌가, 싶어서 어느정도 감정이 식을만한 늦은 밤에 적었습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3-13 10:03)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10-03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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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06 01:04
수정 아이콘
이윤열 선수에게 감정이입이 상당히 많이 되어있으셨나 봅니다.
하지만 머랄까 글 자체도 감정적인 느낌이 많이 들어가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연우
09/03/06 01:11
수정 아이콘
예, 감정 좀 많이 집어넣은거 같아요
피터피터
09/03/06 01:11
수정 아이콘
E-Sport 의 탄생과 함께 이 바닥을 지켜보았던 팬들이라면..

아마.. 박찬호의 등장과 성장 그리고 몰락과 부활을 쭉 함께했던 세대이겠죠.
안정환의 등장과 세계무대로의 진출 그리고 월드컵과 함께 시대의 흐름속에 휘둘리는 안타까움을 함께했던 세대이겠죠.

이윤열의 눈물과, 박찬호의 투지, 그리고 안정환의 마지막 몸부림을 지켜보는 지금쯤에서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모든 것들이 꽤 복잡한 감정으로 제 안에 남아 있음을 알겠습니다.

아마 오늘 이윤열에게서 유난히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이제 서서히 사라져가는 같은 시대의 영웅들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때문인것 같습니다. 마지막을 서서히 준비하는 같은 세대에 대한 묘한 안타까움이 요즘은 유난히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윤열, 박찬호, 안정환... 이들의 아직 끝나지 않은 도전이 최후에는 좀 더 화려하게 타올라서, 끝까지 밝게만 제 기억속에 남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네요.
어흥 어흥
09/03/06 01:19
수정 아이콘
'그러면서 이승원 해설의 말이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부분 심히 공감합니다. 들린다면 '좀 조용히 하라고!'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해설자가 무슨잘못이 있겠냐 싶긴하지만요. 그러고보니 특이하게 4강에 진출한 허영무선수의 축하글은 하나도 없고 이윤열선수에대한 응원글만 있는 특이한 날이네요.
초원의빛
09/03/06 01:2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전 제가 만약 '그 선수'의 플레이가 아닌 그 선수의 '플레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10년간 스타리그를 보고 있지 못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잊을 때도 됐건만 4대천왕 세대에 대한 애정과 추억은 참 오래도 가네요.
최종병기그분
09/03/06 01:37
수정 아이콘
역시 연우님 글은 무언가 있습니다...

조용히 추게로...
라울리스타
09/03/06 02:22
수정 아이콘
조용히 공감하며, 추천합니다.

어떠한 분석적인 리플도 달 수 없는 밤이네요.

마재윤, 이윤열...MSL과 함께했던 전설의 순간이여~
09/03/06 05:30
수정 아이콘
연우님 글 중에 가장 인간미 넘치는 글이네요...

그리고 제 마음과 너무나도 같은 글입니다...
나두미키
09/03/06 08:50
수정 아이콘
역시나.... 왠지... 조용히 동의하게 되는...글입니다.... 역시나 연우님이시군요.. 조용히 추천을...
09/03/06 09:22
수정 아이콘
공감이 많이 가네요ㅠㅜ
나라당
09/03/06 10:24
수정 아이콘
그만큼 이윤열 선수의 눈물의 의미가 크네요.
얼마 전에 본좌시대의 종말인가 하는 좋은 글이 올라왔었는데 이윤열이라면 혹시나 했는데 그마저 눈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여담이지만 최연성 선수만 울면 임이최마 다 우는건가요-_-
스타2잼있겠다
09/03/06 10:32
수정 아이콘
참 이윤열선수 싫어했었죠..
황제 임요환을 짓누르는 경기와 실력..
진짜 제발 좀 지라고 굿을 하고 다녔죠..
제발 좀 저라... 저라... 저라..... 쟤는 언제 진데?? 쟤때문에 스타 망할거야..
이러던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근데 최연성코치한테 지고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보고..
어어?? 저게 이윤열이 아닌데..
분명히 무슨 실수가 있었을거야.. 원래 제 실력대로 하면 이윤열이가 안지는데 말야..
그러다가..
야... 이젠 이윤열이도 세월앞에선 어쩔수가 없구나.. 이젠 동네북이구나...
하지만 그를 그렇게도 싫어했던 그때의 증오심이...
애증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그를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기면 괜히 기분이 좋고.. 괜히 뿌듯하고..
하는일이 잘되고.. 감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윤열은 유일한 올드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승할수 있는 유일한 올드는 이윤열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다야!! 일어나라!!!
youngwon
09/03/06 10:34
수정 아이콘
'그러면서 이승원 해설의 말이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이런 생각이 든 건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조용히 공감하고 갑니다.
Endless_No.1
09/03/06 10:48
수정 아이콘
아......
Who am I?
09/03/06 11:11
수정 아이콘
이윤열선수의 팬은 아니지만 다른 누군가인 '선수'의 팬이기에..
그가 이기는데, 그가 지는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부분에서는 덜컹-했습니다.

기사를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 글을 읽으니까요.
차라리 '나는 누가 좋습니다'라는 수수한 이야기나 '이 선수가 어떤 선수인가요!'라는 감정섞인 외침이 더 마음을 두드리는게지요.

제게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Polaris_NEO
09/03/06 12:08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보는 연우님의 글이군요~
잘읽고 추천한방 누르고 갑니다~
쿠로사키 이치
09/03/06 12:15
수정 아이콘
저도 추천 꾸욱 ^^
좋은 글 감사합니다.
09/03/06 12:19
수정 아이콘
이상하게도 임이최마 본좌라인은 당시 팬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그들의 부활을 기대하게 되더군요.

저도 당시에는 정말 싫었는데 - 가장 큰 이유는 임선수를 다 꺾었기 때문에.. 이윤열 선수는 임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장본인이고, 최연성선수는 결승전에서 임선수를 꺾었고, 마재윤선수는 (당시 이미 기량이 크게 떨어진 임선수였긴 했지만) 어린 아이 손목 비틀듯 슈퍼파이트에서 임선수를 꺾었지요 - 하지만 이제는 임이최마의 부활이 항상 기대되고 그들의 경기에 환호하게 되고 응원하게 되더라구요.

이게 다 로망인가요..
개념은?
09/03/06 12:50
수정 아이콘
잘못하셨네요.. 원래 감정이란 .. 늦은 밤에 더욱 심오해지는것이죠... 허허
Wanderer
09/03/06 19:54
수정 아이콘
조용히 추천 누르겠습니다. 이승원 해설이 저한텐 완소해설이지만 오늘 만큼은 살짝 밉더군요.흐흐.
건가타
09/03/06 20:24
수정 아이콘
잘읽고 갑니다. 조용히 추천한방..
09/03/07 06:52
수정 아이콘
글을 읽다 울컥했습니다~ 어떤 선수에 몰입했는가...이윤열 선수한테 몰입해서봤습니다.

픽사의 예를 보면, 사람들이 찾는 건...지극히 단순한 재미입니다. 그 과정이 중요한 사람들은 전문가들이죠.
(완전한 재미를 주는 작품을 만났을때는 전문가들도 팬일 뿐일때가 많더군요.)
이윤열한테 몰입할 수 있는 재미, 스타를 즐길 수 있는 재미...이윤열 선수 팬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언제나 이윤열 선수의 경기는 재밌습니다.

재미가 몰입을 하게 하고, 재미가 팬이 되게 합니다.

그 재밌는 경기를 오래 오래 계속 보고 싶습니다.
09/03/07 13:3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09/03/13 12:32
수정 아이콘
편...

그 주체할 수 없는 궤도에 진입하셨군요.
축하드리지만 걱정도 됩니다.

연우님의 냉철한 글을 보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도 했거든요. 좋은 하루 되십쇼~
게으른 저글링
09/03/19 13:44
수정 아이콘
김연우님. 늘 훌륭한 전략과 멋진 글들에 감탄하고 있는 애독자입니다. ^^;;

본문에 감동을 받아서 본문 내용중 아래 부분과 첨부된 이미지를 제 블로그에 퍼 담았습니다.
퍼담은 블로그 주소는 http://candyboy.tistory.com/213 입니다.
이 느낌을 잊지 않으려고 서두르다 보니 허락을 받지 못하고 퍼담아서 죄송하구요.
혹시라도 불쾌하시다면 저 블로그에 댓글 남겨주시면 바로 삭제할께요.

퍼담은 내용은 이 부분입니다.

[ 토이스토리 등 여러 3D 애니메이션 히트작으로 유명한 PIXAR 사가 있다. 처음 회사가 만들어지고, PIXAR는 자신들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 위의 두 전등이 등장하는 짧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상영이 끝나고 자신들에게 쏟아질 여러 기술적 이슈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던 PIXAR의 직원이 받은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저 전등이 엄마전등 입니까?"
]
제리드
09/03/29 23:29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엄마 전등 부분을 인용하고(싸이월드 허세용^^) 싶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하지 않을게요
김연우
09/03/30 19:21
수정 아이콘
copy left입니다. 저도 픽사 전시관에서 듣고온 이야기인데요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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