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프로게이머 중 세명을
바로 옆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얼굴만 보고 대만족...
또 한 사람은 얼굴도 보고 경기도 봤으니 더할나위 없었고
그러나 나머지 한사람과는 말도 몇마디 나누고 인사도 나눴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프로게이머들이 그렇듯이
오늘 만난 그도 80년대 생이다.
그러니, 내 나이도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보다는 나이가 많다.
내가 느낀 그는 글쎄 뭐랄까.
참 단단하고 차갑다는 느낌이었다.
웃기도 잘하고 인상도 좋은 편이고...
깔끔한 경기매너에 귀티나는 외모까지 받혀주는 그런 사람이었지만
글쎄, 역시 게이머인 탓에 경기에 몰두해 한없이 냉정해진 모습만을 본 탓인지
그의 이름, 그리고 얼굴을 떠올릴 때면
그 파릇한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싸아한 냉기를 먼저 느껴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 만난 그는, 이런 말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참 '귀여웠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사람들이 건네는 농담을 맞대답하며
웃음으로 말꼬리를 흐리거나
자신의 팬들 중 친한 사람들과 서슴없이 장난을 주고받는 모습,
밥먹으러 간 고깃집에서 젓가락질 못한다고 놀림받던 모습,
지하철 안에서-그는 영화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영화 잡지를 한 권 사 든 채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차근차근 읽어내려가던 모습들.
물론, 얼마전부터 시작된 지하철 방송에서
온게임넷 1주차 경기가 중계되기 시작하자
읽던 잡지를 덮으며 그 화면을 노려보던 눈은
역시나... 싶을만큼 매서웠었지만.
그는 나보다 세코스 앞쯤에 내렸다.
오늘 수고하셨고, 건승을 기원한다는 인사를 건네자
그는 설핏 웃으며 마주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러나... 글쎄.
순간 나는 그의 아직 어린 얼굴에서 숨길수 없는 피곤의 그림자를 읽어버렸다.
게임을 시작한 이래 모니터와 키보드만을 친구 삼아 살아 그런지
유난히 하얗던 그 얼굴의 눈 밑으로 드리워진
숨길 수 없는 어두운 표정을.
잠시 난, 멍해진 채
문이 닫히고 출발하기 시작하는 지하철 창 유리 너머로
저 편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남에 있는 회사를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 회사 근처엔,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이 떠는 스타를 셋이나 거느린 유명한 기획사가 있었고
그래서 그 근방엔 늘 그들을 보러오는 소녀팬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어느날 아주 우연히,
그들이 밴에서 내려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모습을 스치듯 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들의 얼굴에서 읽어지던 그 표정이
오늘 지하철 신도림역에서, 그의 얼굴 위로 잠시나마 나타났었던 것 같다.
난 게임을 못하기도 하지만
설령 잘한다 하더라도 프로게이머는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한경기 한경기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각오로 마우스를 잡고
그다지 확실하지도 않은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그런 직업은...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그러고 있었다.
어린 친구가 힘들겠다는 생각을 안해 본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태연하기에, 너무나 담담하기에
잘 견뎌내는구나 생각했는데...
그 또한 그렇게, 혼자 속으로 많이 아프고 있었나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 둘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얼굴, 아이디, 주종족, 대강의 전적들...
그리고 당장 지난주부터 시작된 온게임넷 스타리그까지.
Show Must Go On이라는 퀸의 노래도 있지만
어쨌든 경기는 계속될 것이고...
또 그들중에 한 사람은 세상을 다 가진듯 웃겠지만
나머지 열 다섯은, 아니 그 이상의 게이머들은
또 피눈물을 삼키며 다시 모니터 앞에 매달려야 하겠지.
물론 그들이 택한 그들의 길이고, 그들의 삶이다.
하지만 오늘...
유난히 가냘파보이던 한 청년의 실루엣이
이토록이나 따갑게, 가슴에 맺혀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God Save Them All.
-Apatheia, the Stable Spi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