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에서 시작한 천간 글자의 마지막, 북방/천간 계(癸)에 이르렀다. 癸의 자원과 파생된 한자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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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癸의 갑골문 1, 2, 금문 1, 2, 3, 초 문자, 진(秦) 문자, 주문, 소전, 진(秦) 예서, 한나라 도장 문자. 출처: 小學堂
지금의 癸는 등질 발(癶)과 하늘 천(天)이 합한 형태지만, 옛날 형태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갑골문은 45° 돌아간 십자 끝이나(갑골문 1) 가운데(갑골문 2)에 90°로 교차하는 획이 놓여 있다. 금문은 이 형태를 본받거나(금문 1) 교차하는 획이 굽어지고(금문 2) 대칭이 깨져서 아래 십자에서는 획이 뻗어나간 형태로 변형되기도 했다(금문 3). 전국시대 문자에서는 금문 3이 변형된 형태가 나타난다. 《설문해자》의 주문은 진(秦) 문자를 계승했고, 소전은 더 옛날의 갑골문과 금문에 더 가깝다. 지금의 癸는 주문에서 나온 예서와 한나라 도장 문자의 형태를 본받았다.
癸는 《설문해자》에서는 “겨울에 물과 흙이 평평해져 측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이 사방에서 땅 한가운데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상징한다. 癸는 임(壬)을 뒤이어 사람의 다리를 상징한다.”라고 풀이하며, 《설문해자》에서 다른 모든 간지 글자들이 그렇듯이 부수 글자로 내세웠으나 단 하나의 글자도 속하지 않는다. 대신 이 한자가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들이 여럿 있는데, 이 풀이는 그 중에서 헤아릴 규(揆)를 의식하고 있다.
癸도 다른 천간 글자들처럼 천간으로 쓰이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용례에서 원 뜻을 추정하기 어렵다. 그나마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군량을 뜻하는 경계(庚癸), 월경을 뜻하는 천계(天癸) 등으로 쓰이기도 하나 경계는 庚과 癸가 천간에서 각각 서방-곡식, 북방-물을 주관한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천간 글자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癸에서 파생된 형성자에서 추정한 자원 설명이 여러 가지 있는데, 모두 어떤 물체의 모습을 본뜬 상형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주요한 설로 첫째는 창 규(戣)의 초문, 둘째는 헤아릴 규(揆)의 초문, 셋째는 아욱/해바라기 규(葵)·계수나무 계(桂)의 초문이라는 것이다. 창으로 보는 설에서는 두 개의 창과 같은 무기를 엇갈려 배치한 모습으로 본다. 측량하다, 헤아리다로 보는 설에서는 엇갈린 나무 모양이나 사람이 팔다리를 편 형태 등 측량 도구의 모습으로 본다. 식물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설에서는 네 잎이나 꽃술이 엇갈린 모습으로 본다.
한국의 김은희 교수는 癸의 엇갈린 십자 형태는 태양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으로 해석했고, 태양 빛으로 사방을 측량하는 행위에서 측량하다는 뜻이 나온 것으로 보았다. 본디 갑골문에서 癸의 형태는 나무 목(木)과 거리가 있었으나 소전은 45° 기울어진 木이 교차하는 형태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나무로 태양 그림자를 재는 등 측량 도구를 나무로 만들어 쓰면서 글자 모양을 木을 기초로 재정립한 것이 된다. 그리고 癸가 사방을 나타내기 위해 교차된 형태에서 교차하다, 엇갈리다는 뜻이 나와 어그러질/반목할 규(睽)가 파생되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아욱/해바라기 규(葵)는 아욱이나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햇빛을 '헤아리는' 식물이라서 癸가 들어갔다고 했다.
셰 징촨(謝景泉)과 차오 멍(曹萌)은 癸를 거북 귀(龜)의 이체자에서 네 발만 남고 등딱지와 머리, 꼬리를 생략한 형태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거북은 옛 중국에서 점을 쳐 미래를 헤아리는 용도로 썼기 때문에, 이에서 揆가 파생되었다. 또 거북이 두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에서 주시하다는 뜻의 睽가 파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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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와 관련이 있는 龜의 갑골문. 출처: 小學堂
또 위키사전에서는 네 손잡이가 있는 쟁기의 모양이라는 설을 제시했다.
癸의 원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에서는 癸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뜻이 크게 둘로 나뉘는 것에 주목하는데, 각각 揆가 대표하는 '헤아리다'와 睽가 대표하는 '엇갈리다'다.
癸(북방/천간 계, 계유정난(癸酉靖難), 천계(天癸: 월경) 등. 어문회 3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癸+戈(창 과)=戣(창 규): 어문회 특급
癸+手(손 수)=揆(헤아릴 규): 규지(揆地: 해의 그림자로 땅을 측량함), 탁규(度揆: 헤아려 잘 생각함) 등. 어문회 2급
癸+日(날 일)=暌(어길 규): 인명용 한자
癸+木(나무 목)=楑(망치 규): 종규(柊楑: 무엇을 치거나 박을 때 쓰는 물건, 곧 메) 등. 인명용 한자
癸+水(물 수)=湀(물솟아흐를 규): 인명용 한자
癸+目(눈 목)=睽(어그러질/반목할 규): 규(睽: 64괘의 하나. 이괘와 태괘가 거듭한 것으로, 위는 불, 아래는 못을 상징함), 규괘(睽卦: 규) 등. 어문회 특급
癸+艸(풀 초)=葵(아욱/해바라기 규): 규곽(葵藿: 해바라기), 동규(冬葵: 아욱) 등. 어문회 1급
癸+邑(고을 읍)=鄈(땅이름 규): 인명용 한자
癸+門(문 문)=闋(문닫을 결): 결(闋: 악곡이 끝남), 복결(服闋: 상복을 벗음) 등. 인명용 한자
癸+馬(말 마)=騤(말건장할 규): 어문회 특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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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에서 파생된 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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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揆의 소전, 전한 예서, 후한 예서 1, 2, 출처: 小學堂
헤아릴 규(揆)의 소전은 癸의 소전이 아니라 주문과 결합하고 있는데, 이는 《설문해자》에 수록된 거의 모든 癸에서 파생된 한자들이 그렇다. 예외는 딱 하나, 癸의 소전과 결합한 아욱/해바라기 규(葵)뿐이다. 전한 예서에는 위에서 제시한 癸의 진(秦) 문자의 모습이 엿보이고, 후한 예서에서는 癶의 아래에 뭍 륙(陸)과 연관되는 버섯 록(圥)의 모습이 보인다. 癸의 아랫부분이 지금의 天이 되기까지 중간 변화를 揆의 변화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한자는 한국에서 주로 사람 이름에 많이 쓰이는데, 이는 항렬자(行列字)와 관련이 있다. 항렬은 같은 혈족에서 갈려 나온 계통 간의 관계를 나타내며, 같은 항렬 관계에 있는 관계, 즉 형제뻘 되는 관계를 보이기 위해 지정하는 것이 항렬자다. 항렬자를 같이 쓰는 혈족들은 선조에게서 갈려 나온 대수가 같게 된다.
따라서 항렬자는 대수마다 다르게 지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쓰는 방법들이 오행에 따라 정하는 오행상생법, 수에 따라 정하는 수교법, 천간에 따라 정하는 천간법, 지지에 따라 정하는 지지법 등이다. 이 중 천간법에 따르면 아홉째 주기가 계(癸)가 들어가는 한자들이다. 항렬자 정하기는 융통성이 꽤나 있어서 꼭 癸가 정확히 들어가는 한자여야 하는 건 아니고 대충 비슷하게 생겨도 되긴 하지만 엄격하게 癸가 들어가는 한자는 위에서 나오다시피 몇 없고 이름에 써도 될 법한 한자는 더 줄어든다. 그 중 대부분을 바로 이 揆가 차지한다.
예를 들어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항렬자는 12대부터 21대까지는 천간법에 따르고 22대부터는 지지법을 따르는데, 천간법 마지막인 21대의 항렬자가 바로 이 揆다. 마침 20세기 말 - 21세기 초가 이 21대 근방에 있기 때문에 지금의 효령대군파에서는 揆를 이름에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는 사람도 그렇다.
이 한자는 헤아린다는 뜻에서 발전해 내각의 우두머리, 재상을 뜻하기도 한다. 조선에서도 영의정을 수규(首揆)·영규(領揆), 좌의정을 좌규(左揆), 우의정을 우규(右揆)라 하기도 했지만, 이 용례는 현대에는 중화권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대만이나 홍콩에서 총리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 각규(閣揆)로, 대만 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인 중화민국 행정원 원장의 호칭도 각규다. 외국의 총리들을 표현할 때에도 이 揆라는 한자를 쓸 수 있다. 예를 들면 영국 수상을 영규(英揆)라고 하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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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睽의 금문, 소전, 후한 예서. 출처: 小學堂
어그러질/반목할 규(睽)는 서주 후기의 금문에서 처음 나타나며, 여기에서는 눈 목(目)이 지금처럼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위치도 癸의 위에 놓여 있다. 위에서 셰 징촨과 차오 멍이 睽를 거북이 두 눈으로 앞을 주시하는 모습이라고 본 것도 이 금문에서 비롯한 것이다. 소전과 예서에서 癸의 변화는 위에서 본 揆에서 癸의 변화와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한자를 쓰는 단어로 규와 규괘만이 실려 있다. 이 규괘는 위는 불, 아래는 못물이 있는 것을 상징해, 두 눈이 서로 반목한다는 睽의 뜻을 가져왔다. 그러나 《주역》의 괘사에서는 이 괘를 길한 괘로 풀이하는데, 서로 상이하고 반목하지만 다르기에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방향으로 해석을 이끌어 나간다. 유교에서는 군자는 화이부동, 곧 같지 않으나 화합한다고 하고, 소인은 동이불화, 곧 같으나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다름 속의 조화를 강조하며, 이런 사고가 규괘의 해석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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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闋의 소전, 후한 예서. 출처: 小學堂
문닫을 결(闋)은 《설문해자》에서는 “일이 끝나, 문을 닫는다는 뜻이다. 문 문(門)이 뜻을 나타내고 癸가 소리를 나타낸다.”라고 풀이했다. 김은희는 이 한자 역시 어긋난다는 의미 범주에 포함된다고 보았는데, 문을 닫는과정에서 두 문짝이 엇갈린다고 본 것일 것 같다. 《설문해자》의 풀이대로 문을 닫는다는 데에서 일이 끝난다는 뜻이 인신되어,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 한자를 쓰는 낱말도 곡을 끝낸다는 결(闋), 상을 마친다는 복결(服闋) 등 끝나다는 뜻으로 나오고 있다. 후한 예서에서는 癸의 아래가 많이 뭉개져, 圥과 天의 중간 형태가 보이는 것 같다.
癸는 파생된 한자들에 측량 도구, 또는 거북이나 거북점에서 인신되어 헤아리다, 또는 엇갈리다는 뜻을 부여한다.
揆(헤아릴 규)는 手(손 수)가 뜻을 나타내고 癸가 소리를 나타내며, 癸의 뜻을 따라 헤아리는 것을 뜻한다.
暌(어길 규)는 日(날 일)이 뜻을 나타내고 癸가 소리를 나타내며, 癸의 뜻을 따라 빛이 어긋나는 것, 나아가 어기는 것을 뜻한다.
楑(망치 규)는 木(나무 목)이 뜻을 나타내고 癸가 소리를 나타내며, 癸의 뜻을 따라 헤아리는 것을 뜻한다.
湀(물솟아흐를 규)는 水(물 수)가 뜻을 나타내고 癸가 소리를 나타내며, 癸의 뜻을 따라 물이 솟아올라 서로 엇갈리는 것을 뜻한다.
睽(어그러질/반목할 규)는 目(눈 목)이 뜻을 나타내고 癸가 소리를 나타내며, 癸의 뜻을 따라 눈이 서로 어긋나 반목하는 것을 뜻한다.
葵(아욱/해바라기 규)는 艸(풀 초)가 뜻을 나타내고 癸가 소리를 나타내며, 癸의 뜻을 따라 햇빛을 헤아려 움직이는 아욱이나 해바라기를 뜻한다.
闋(문닫을 결)은 門(문 문)이 뜻을 나타내고 癸가 소리를 나타내며, 癸의 뜻을 따라 문을 서로 엇갈려 닫는 것, 나아가 일이 끝나는 것을 뜻한다.
이상의 관계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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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요약
癸는 엇갈린 창, 측량 도구, 식물의 모양을 본뜬 글자라는 설 등이 있다.
癸에서 戣(창 규)·揆(헤아릴 규)·暌(어길 규)·楑(망치 규)·湀(물솟아흐를 규)·睽(어그러질/반목할 규)·葵(아욱/해바라기 규)·鄈(땅이름 규)·闋(문닫을 결)·騤(말건장할 규)가 파생되었다.
癸는 파생된 글자들에 헤아리다, 또는 엇갈리다의 뜻을 부여한다.
※이 글은 김은희의 〈한자 癸의 고문자 형체에 담긴 문화적 상징의미〉(중국어문논역총간, 2011, 29, 179-202), 셰 징촨(謝景泉)과 차오 멍(曹萌)의 〈갑골문 「癸」자 형의 신석〉(甲骨文「癸」字形義新析, 역사문화(歷史文化), 2023, 117, 65-68)을 바탕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