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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7/04 22:31:33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강희제 이야기(13) ─ 북에서 이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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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여, 차르를 수호 하소서(Боже, Царя храни!)


 하느님, 차르를 지켜 주소서!
 자랑스러운 차르에게, 새로운 시대의 빛을 보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을 진정케 하시고, 약한 백성을 지켜 주시고,
 모든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모든 축복을 내려 주소서! 

 하느님, 차르를 지켜주소서!
 
 강하고 장엄한 차르여,
 폐하와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군림하소서. 

 차르가 적의 두려움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차르는 정교회의 지도자이니,
 하느님, 차르를 수호하소서!

 ─ 바실리 주콥스키(Василий Жуковский), 러시아 제국 국가. 1815년 판, 1833년 판.




러시아의 역사는 초원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의 키예프 공국, 그리고 폭력과 살육을 남긴 황금군단의 킵자크 칸국. 동유럽에 드리운 몽골의 강력하고 어두운 그림자는, 14세기 말 칸들의 울루스 통치가 심각하게 약화되면서 변모하였습니다. 여러 신생국이 칸의 통치를 갈라놓았고, 내부 계승자들간의 통치권 투쟁은 그들의 역량을 떨어뜨렸습니다. 용맹무쌍한 드리트리 돈스코이(Dmitrii Ivanovich Donskoi) 모스크바 대공(大公)의 빛나는 승리는 토크타미시(Tokhtamysh)가 벌인 1382년 벌인 모스크바 약탈 덕분에 그 빛이 가려지긴 했으나, 1390년대, 토크타미시가 한명의 거인과 겨루는 동안 몽골의 통치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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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강, 최악의 정복자 중 한사람. 티무르.



'정복자' '학살자' 그리고 '무질서의 지배자' 이 모든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그 변화무쌍함을 적절히 표현하기 힘든 인물, 티무르(Timur). 그는 토크타미시를 분쇄했고,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다른 모든곳과 비슷하게' 수많은 도시들을 파괴하고, 이미 질서가 있었던 곳에 파괴와 무질서를 남긴채, 그곳에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물러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티무르가 근방의 주요 도시들에 철저한 재앙을 안겨준 덕분에, '금장 호르드(Golden Horde)' 의 교역 기반은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티무르 이후 몽골의 통치자들은 이 새로 등장한 용맹무쌍한 러시아인들의 독립국을 복속하는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졌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미 실질적으로, 동러시아는 타타르의 저주받을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 시켰습니다.


1451년, 모스크바에 닥쳐온 타타르인의 습격은 분쇄되었고, 이후 많은 타타르인들은 모스크바의 지배자에게 신속(臣屬)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떠오르는 모스크바 국가는 현명한 대공의 통치 아래 러시아인들과 타타르인들이 섞인 백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몽골에게서 벗어난 모스크바 공국은 16세기 중엽 가잔과 아스트라칸에 대항에 동시베라이로 극적인 팽창을 이뤄내었습니다. 


카잔 정복을 완료한 모스크바는 이전과는 또다른 모습이 되었고, 제국으로 성장하는 국가의 모습을 살찌우고 드러내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영토적 야망과, 통치에 대한 야심을 충족시킬 '부'를 찾아, 초원을 넘어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동방 팽창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큰 비용이 필요하지 않고, 저비용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할 수 있으며, 차르의 이익을 위해 원주민들을 쥐어짜내어 부를 만들 수 있는곳.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동쪽으로의 시선을 완전히 거둘 순 없었습니다.


카잔 등을 접수하고 잠시 숨을 고르던 러시아는 30여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동방으로의 팽창을 시작했습니다. 막아세우는 유목 국가의 칸도 없고, 복잡한 외교도 필요하지 않은 시베리아의 삼림에 그들은 하나씩 요새를 세우고 주요한 강에 거점을 세우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섰습니다. 태평양에 도달하고,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이를때까지 말압니다.


이 전진을 대전진이라고 표현하긴 어려운 데, 마치 서부로 금을 찾아다니던 미국인들처럼 상인과 기업가, 점령지의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군관들이 불안정하게 감독을 하고, 적당한 대리인들이 천천히 작은 전진기지를 세우면서 현지 부족들과 협상도 하고 하면서 걸어나간 것입니다. 애시당초 동쪽에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할 세력은 없으니 거대한 방어선이나 대규모 원정군은 필요 없었고, 주 목적은 대단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모피였습니다. 수달, 담비, 밍크 모피 등등을 얻어서 많은 이윤을 내고, 또 그것들이 고갈 되자 더 찾기 위해 동진을 계속해 나간 것입니다. 
 



하바로프(Yerofey Khabarov)


시베리아의 고독한 숲 속에서는 농업 생산물이 매우 적었고, 사냥에 강점을 보이는 현지 원주민들과는 달리 러시아인들은 지리를 전혀 몰랐기에 함부로 사냥할 수도 없고, 보급품도 없고 증원 병력도 없는 전진기지들 안에서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1640여년 아무르를 탐사한 바실리 포야르코프(Vasily Poyarkov)의 탐험대는 기아로 거의 죽어가다가 이 지역에 도착했고, 이곳에 '기름진 들이 있고, 엄청난 인구가 농사를 지으며, 검은 담비와 물고기가 넘치는 넒은 강 계곡을 발견했다' 고 보고 했습니다. 이후 모험가 하바로프는 1650년에 알바진에 요새를 구축했고, 현지의 다우르인들이 말로만 듣던 중국 제국에 조공을 바친다는 말을 듣고,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 중국을 공격, 그 부를 빼앗을 맹랑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르의 넘치는 부에 대한 과장된 소문으로 군인, 사냥꾼, 상인, 관리, 정교 성직자, 도주한 농노, 기업가와 상인, 전쟁 포로, 코사크인, 장인, 모험가, 유랑자, 범죄자, 탈영병등등 가지각색의 세력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습니다. 1719년에 시베리아의 성인 남성은 16만 9천여명이었고, 1792년에는 41만 2천여명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나선 정벌 당시의 조선군 묘사


순치제 시절부터 청은 이들 러시아 세력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러시아인들이 마침내 송화강 유역까지 내려오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시기 청은 기본적인 무기의 위력 차이로 여러차례 난감한 상황에 처했으며, 결국 조선에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654년 조선은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주어 지원군으로 파견하도록 하였고, 청군 3천여 명과 연합하여 7일만에 러시아 군을 패퇴시켰습니다. 그 후에 1658년에도 조선은 청군의 협조 요청에 혜산 첨사 신유에게 총군 200명과 초관 60여명을 파견하여 러시아군 270여명을 전사시켰습니다.


이후로도 1660년 무렵을 비롯해서 청은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해 철수 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무주공산이 된 이 땅으로 1665년에 체르니코프스키가 이끄는 군사가 도착하여 알바진을 점령했고, 러시아 차르는 정식으로 그를 알바진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후, 1675년이 되면 알바진을 정식으로 네르친스크 의 관할에 두게 됩니다. 알바진을 근거지로 삼은 러시아 인들은 흑룡강 중하루의 일부 지역으로 들어가 주택을 건설하기까지 했습니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 지역 소수민족들에게 곧바로 나타났는데, 오랜 시간 지역에 거주한 다구르 족의 추장 간티무르(Ghantimur)가 1667년 가족과 부락 300여명을 이끌고 러시아 관할 지역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는 청조에 귀부한지 15년이 지난 인물임에도 이 새로운 세력의 등장에 즈음하여 편을 갈아탔습니다.


청나라는 이에 동요하여 러시아 측에 간티무르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그는 돌아오지 않고 러시아에 머물었습니다. 15살의 강희는 이 사안을 가볍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이것이 잘못되면 변경에서 청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나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러시아가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과 면담을 하자고 직접적인 요구를 했으나 아무 소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670여년, 밀라바노프라는 인물을 단장으로 하는 10명의 사절단이, 북경으로 도착하여 16살의 강희를 만났습니다. 당시 그들이 전달한 러시아 차르의 문헌은 실로 어마어마한 내용이었습니다.


"너희들(밀로바노프 등)은 중국의 칸에게 이렇게 설명하라. 여러 국가의 군주와, 국왕은 이미 그 신민을 이끌고 우리 대군주(차르)에 귀의했다. 러시아 황제 폐하 최고 통치 아래 너 중국의 칸 역시 우리 대군주에게 도움을 구하라! 러시아 황제 폐하의 은택은 우리 러시아 황제 폐하 최고 통치 아래에 귀의하여 영원히 변치 않고, 우리 대군주에게 공납을 바치고, 우리 대군주가 윤허하여 러시아 황제 폐하의 신민은, 너희 나라 신민과 쌍방 국경 안에서 자유롭게 통상하라."


만약 이 내용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면 밀라바노프를 비롯한 일행은 능지처참으로 참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에서는 러시아 어에 능숙한 통역관이 부족하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희는 오히려 이들을 매우 우호적으로 접대하고, 많은 예물을 주면서 간티무르를 자신에게 넘겨주고, 이후 문제를 만들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강희의 명령은 몽고어로 한번 번역되고, 러시아인들이 그 자리에서 몽고어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전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676년 다시 돌아온 그들은, 러시아의 조회에서는 중국 황제의 친서에 대하여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사정을 알 수 없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강희는 그들을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이때 북경에 있던 벨기에 선교사 페르비스트는 이들과 접촉하여, 차르가 간티무르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강희는 전쟁을 할 것이며, 선제 공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준비가 충분히 되기 전까지 황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차르가 답변이 없다면 응분의 공격을 취할것이니, 많은 병력으로 지키는것이 낫지 않겠냐는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간티무르의 송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청나라가 삼번의 난이라는 대사건에 직면하여 여력을 모조리 그쪽으로 돌리는 동안, 러시아는 점점 더 깊숙히 내려오면서 세력을 넒혔습니다. 그전까지 보고만 있던 강희는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되자 다시 시선을 동북에 두었습니다. 이 전혀 새로운 적에 대해 젊은 강희가 고심하고 있는 사이, 중앙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또다른 이상 현상이 포착되기 시작했습니다. 


 가르단(Galdan), 아마 강희의 인생 최고의 호적수가 고개를 들이밀던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라시드 앗 딘(Rashīd al-Dīn)은 오이라트라는 초원의 부족을 처음 묘사한 인물 중에 한명입니다. 1201년, 몽골 계통의 부족 오이라트의 족장 쿠두카 베키는 그 유명한 칭기스칸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습니다. 이들은 '삼림 민족'으로 불렸는데, 실제로도 유목보다 사냥과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했습니다. 이 부분은 만주족과 비슷합니다.


다른 초원의 부족들처럼 그들은 주술사가 사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고, 북쪽으로는 키르기스와 나이만, 동쪽에는 메르키트, 서쪽으로는 투마트 등을 이웃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1201년의 전투는 신화적인 색채로 윤색되어있는데, 전투의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이라트 쿠두카 베키(그리고 다른 세 사람), 이 네 사람은 자무카(Jamuqa)의 군대를 싸움으로 이끌었다. 두 군대가 서로 돌격하는 순간, 위대한 주술사들인 부이룩 칸과 쿠두카는 주술로 폭풍과 어둠을 불러왔다. 그들은 우리를 눈멀게 하려고 폭풍과 어둠을 불렀지만, 순간 폭풍이 방향을 바꿔 적군 자신들의 눈을 가렸다. 그들의 병사들은 산비탈 계곡으로 뛰어내리면서 앞을 보지 못한 채 절규했다.

 "하늘이 우릴 배신했도다!"

 그리고 그들의 군대는 흩어졌다. 쿠두카 베키는 숲으로 도망가서 시스기스까지 물러났다.



싸움이 끝난 후 달아났던 쿠두카 베키는 현명한 결정을 내렸는데, 수하의 4천을 이끌고 테무진에게 귀순한 것입니다. 쿠두카는 이후 1217년에  칸의 아들 주치의 원정을 도왔고, 그 영향으로 칭기스칸의 후손들과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칭기즈칸이 죽고 나자, 오이라트는 나누어진 네 형제 ─ 곧 톨로이, 우구데이,차가타이, 주치의 영지와 모두 마주하는 절묘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시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카가 벌인, 몽골 제국 중 가장 거대하고 역사가 깊은 영지를 두고 벌인 대전에 참여하여 쿠빌라이에 대항했습니다. 승리자는 쿠빌라이였고, 오이라트는 그 대가로 한 세기가 지날때까지 역사 속에서 전혀 이름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쿠빌라이 칸의 권세는 하늘도 가를 지경이라, 바야흐로 세계의 지배자라고 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후진적인 ─ 그러나 또 어쩔수 없는 ─ 행정 체계를 이루어내었고, 색목인들의 조세 정책은 조세를 걷는다기보다는 약탈에 가까운 수준으로,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 홍무제 주원장은 문자 그대로 그들을 중국 내에서 '밀어내었습니다.'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 즉 토곤 테무르는 싸움 한번 못해보고 수도를 버리고 북으로 향하였는데, 이제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오이라트는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됩니다. 이번엔 쿠빌라이의 후손들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서 말입니다.


명나라가 즉위 초부터 말기까지 에센 타이시, 알탄 칸 등의 몽골에 시달린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 수 있을법한 오해가, 에센 타이시나 알탄 칸등을 동일한 소속으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오이라트는 기존의 몽골 세력이 비하면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몽골 초원의 ─ 보통 타타르라고도 이야기를 많이 하는 ─ 몽골 세력과는 계속해서 싸우던 존재입니다. 게중에 오이라트가 몽골 세력을 모조리 눌러버리고 자신들이 우위에 있던 시절이 있는 반면, 몽골 세력 ─ 편의상 타타르 ─ 이 오이라트를 눌러버리고 패권을 차지하던 시기도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명나라 시기에 오이라트와 타타르는 서로에게 있어 최대의 적입니다. 되려 명나라는 서로간의 대립에 비하면 두 몽골 계통 세력에게 있어 최대의 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다툼은, 1399년 타타르의 엘베크 칸이 오이라트에 살해당하여 절정에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두 세력의 분쟁을 지켜보는것은  막 개국하여 국력이 넘치던 거대한 제국, 명나라였습니다.




1408년, 타타르의 새로운 칸이 즉위하자 실질적인 배후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아룩타이(Aruqtai)에게 명나라의 영락제는 사절을 파견했지만, 영락제의 사절은 피살당했습니다. 그러자 영락제는 오이라트의 편을 들며 이 초원의 분쟁에 개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영락제에게 작위를 받은 인물 중에 한명이 바로 오이라트의 마흐무드(Mahmud) 였습니다. 


1409년, 영락제는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 구복(丘福)에게 10만의 군대를 맡겨 파견하였고 마흐무드도 이를 도왔습니다. 구복은 병졸로 시작해 대장군까지 된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었으나, 이 당시 나이가 무려 66세(1343년생) 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판단을 그르쳐 너무 깊숙히 적을 추격하는 유목민족을 상대로 하여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보급로도 찾을 수 없는 먼 초원의 한복판에서 대군은 타타르 군대에 포위당하였고, 군대는 전멸하고 대장군 구복도 이름도 모를 초원 한복판에서 사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영락제는 제국의 수도를 북경으로 옮겨 무게의 중심을 다시 북쪽으로 돌려놓았습니다. 북경에서 저 타타르와의 거리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위험 할수도 있고, 어찌보면 그들을 견제하는 배수의 진일수도 있습니다. 1410년, 영락제는 무려 50여만의 엄청난 대군(현실적으로는 10만~20만), 3만대의 수레를 이끌고 북경을 출발하였습니다. 총사령관은 다름 아닌 영락제 본인이었습니다


영락제는 우선 오이라트의 세력 앞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자신을 거스른 타타르에 대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타타르의 칸은 오이라트의 마흐무드가 추격하여 살해했고, 그 부대는 영락제에게 철저하게 격파되었습니다. 따로 남은 타타르의 실권자 아룩타이는 영리하게도 자신은 이제 조공을 바칠것이고, 자신을 동맹으로 받아준다면 항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영락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오이라트의 마흐무드였습니다.


마흐무드가 보기에, 저렇게 타타르와 명이 손을 잡는다면 오이라트가 몹시 위기에 처할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는 3만의 병력을 케롤렌 강 쪽으로 보내, 중국에 대한 군사적인 움직임에 나섰습니다.






북경의 영락제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다시 한번 대군을 일으켰습니다. 1414년, 툴라강에서 명나라 대군과 오이라트 군대가 교전했고, 명군의 대포는 이들을 격파했습니다. 그러자 오이라트 군대는 도주했는데, 영락제는 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도주한 마흐무드가 화친을 요청하자, 영락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별 수 없어서일 뿐 완전히 신뢰하였던것은 아닙니다.


그때 타타르의 아룩타이가 마흐무드를 죽이는데 성공, 일시적으로 세력을 잡고 오이라트를 눌러, 명은 오이라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타타르가 문제가 되어, 북경으로 가는 대상들을 약탈하는 등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영락제는 또다시 진군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의 내부에서는 이런 끝없는 원정에 대한 반발이 나서고 있었습니다. 3차 원정에서는 수레 117,573대, 병력은 235,146명, 곡식은 37만석, 당나귀는 34만 마리에 또다시 20만 마리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이는 국가의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습니다. 제국의 관료들은 이 서북원정과 더불어 저 위대한 항해가 정화(鄭和)가 벌이는 원정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에 대해 크나큰 우려를 표시했는데, 이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소비를 해도 실제적인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룩타이가 영락제의 공세에 대응한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달아나버리는 것입니다.


한차례 교전을 벌이면, 명군은 틀림없이 아룩타이를 지옥 구덩이로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번이 불가능했습니다. 춥고 메마른 사막의 한 가운데서 대군은 움직이기는 커녕 자리를 유지하는것도 어러웠고, 울란바타르에 도착했지만 적군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영락제는 화가 나서 아룩타이와 전혀 관련이 없는 부족 셋을 박살내었습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영락제는 쓸쓸하게 귀환했고, 이는 4번째, 5번째 원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룩타이를 추격하고, 보급이 부족해져서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돌아오고. 


영락제는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마지막 원정의 귀환길 전에 사망했습니다. 영락제는 분명 홍무제 이후 명조의 황제들 중에 가장 용맹무쌍했고, 명암이 있는 군주지만 군사적인 식견, 무엇보다 초원세력에 맞서 스스로 기지개를 켜고 나와, 지도에서 보이는 세계의 끝으로 용감히 행군할 준비를 언제든치 마친 인물이었습니다. 중화인들의 세계관에서 바야흐로 세계의 끝으로 이동한 영락제는  북정록(北征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자들은 종이에 있는 것만 볼 줄 안다. 이것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과 비교할 게 못 된다." 


북으로 진군하여 저 몽골 제국의 잔당을 물리치는데 있어 연왕 주체, 성조 영락제 보다 적합한 인물이 누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 영락제 조차도 원정의 가장 큰 목적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제국을 구성하는것은 수많은 숫자들의 합이고, 이는 원정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게 됩니다. 간단하게 말해, 원정을 성공시켰을 경우 예상되는 기대 비용보다 원정을 시행함으로서 사라지는 원정 비용이 더 거대했던 것입니다.


영락제 이후 명은 다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칭기스칸, 티무르. 이러한 이름들에 견줄만한 위대한 몽골계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고 명나라의 번영은 끝도 없을 정도로 가공하였으나, 명은 그들 유목 세계에 대해 결정적인 피해를 줄 아무런 방법도 없었고, 실제로 말하자면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룩타이의 타타르에게 밀렸던 오이라트는 다시 한번 반격에 나섰습니다.


아룩타이는 오이라트에게 패했고, 결국 1434년 사망했습니다. 죽은 마흐무드의 후계자 토곤과, 다시 그를 이어받은 아들 에센 타이시가 위업을 이어나갈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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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제



명나라의 전성기를 말할때, 선덕제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영락제가 이전, 그리고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과 비교해서 대단히 공세적이었던것에 비하여 영락제의 아들 홍희제(洪熙帝)는 성향이 그와는 완전히 반대였고, 남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도 고려하였으나 워낙 일찍 사망하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순신은 농담 삼아 홍희제가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중 감소에 성공했다면(홍희제는 대단히 비만이었다고 합니다) 제국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홍희제의 뒤를 이은 선덕제는 영락제와 홍희제의 극단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일단 이런 이야기는 넘어가겠습니다. 중요한건 오이라트의 일인데, 선덕제의 기간동안 실제로 오이라트는 중국 내부에 위협을 줄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고, 선덕제는 무탈하게 치세를 이어나갔습니다. 문제는 정통제(正統帝)의 시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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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제는 1436년에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이라트의 에센은 1443년, "타이시"의 칭호를 물려받음으로서 곧바로 움직임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중국에 우호적이던 몽골인들을 공격했고, 이후 명나라에 수천명의 어마어마한 조공사절을 보냈습니다. 조공을 바친 후 주어지는 하사품을 기대한 것입니다.


명나라는 이에 경악했고, 사절을 적당히 보내라며 불평하였으나 되려 오이라트는 실제보다 조공 사절의 숫자를 부풀리는등의 면모를 보이자, 참지 못한 명은 이를 막아버렸고 결국 이에 불만을 가진(혹은 핑계를 만든) 에센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정통제의 대응입니다. 명나라와 오이라트의 전력 자체는 하늘과 땅이였으며, 하물며 그들을 추격하려 막북까지 진격하는것도 아닌, 제국의 내부에서 물리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통제는 군사적인 일에 무능한 자신이 직접 출전하면서, 최고 보좌역으로 환관 왕진(王振)을 데리고 나섰습니다. 왕진은 문제가 많은 인물이지만 그 내부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왕진이 군사 경험이 전무했다는것만 말하고자 합니다. 


한명의 유능한 장수에게 일군을 보내면 족할 싸움을, 굳이 친정을 권한 사람도 왕진이었습니다. 결국 오합지졸로 모인 50만 대군은 에센에게 격파당했고, 그들은 토목보라는 요새에서 갇히다가 결국 명제국의 황제가 에센의 포로가 되는, 사상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이 명과 오이라트의 군사적인 힘의 차이를 말한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중간 과정이 엉터리같은 일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사건은 "사고"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게 "쓸데없이"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보급의 어려움을 초래하지도 않을 테고, 너무 진격하다가 갑자기 후퇴하여 후위를 마구 공격하지도 않았을테고, 가장 가까운 도시를 "왕진의 재산을 담은 수레들을 잊어버릴까봐" 들어서지 않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토목보대전 약도


이 전투가 "사고"에 가깝다는 가장 큰 증거로, 심지어 승리한 에센조차 무엇을 해야할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놀라운 전투는 8월에 일어났지만, 그들이 북경까지 이른것은 10월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동안 북경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국가라는것은 곧 왕조, 왕을 포함한 지도부가 잡혔다는것은 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수준이었기에 명나라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남경으로 도망가자는 소식까지 나왔는데, 이것을 막은것이 병부시랑 우겸이었습니다. 그는 송나라의 예를 들며 남쪽으로 이동한다면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만약 이떄 명나라가 남경으로 이동하고, 에센이 북경을 장악하면 이것은 남송을 재현하는 일이 다름 아닙니다. 우겸의 이런 대처 속에 명나라는 우선 황제를 비워두면 안되기에 정통제의 동생 경태제를 황제로 삼았습니다. 명나라로서는 다행인 일은 저 남쪽에 남경이라는 대도시가 있고, 그곳에 물자가 대단히 풍부하다는 점입니다. 우겸은 이 물자들을 북경으로 끌어모으고 엄청난 방어 요새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겸의 준비란 실로 엄청난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22만의 병력을 북경의 아홉개 성문에 배치했습니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상서 우겸, 무청백 석향(石享),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이외에도 남쪽 외성의 역할을 하고 있던 옛 금의 중도성(中都城)의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포진하였고, 북경성 안은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병료급사중 정신(程信) 등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렇게 22만의 대군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우겸은 단호하게 성문을 닫아버리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교가 군대를 버리고 먼저 도망가면 군대가 그 목을 베고 군대가 장교를 버리고 도망가면 뒤따르던 부대가 그 목을 베라!"



그리고 창평백 양홍(楊洪)을 필두로 하여 요동의 총병관, 산동, 산서, 하남, 섬서의 각 순무들에게 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며 만반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1449년 10월 11일. 마침내 에센 타이시의 군대가 북경 근처에 도달했습니다. 이 전투 결과로 몽골을 물리치고 한족의 제국을 건설한 명나라가 다시 몽골에 눌려버리느냐, 아니면 제국으로서 위엄을 유지하느냐가 달려있었습니다. 에센은 우선 창의문을 공격했으나, 왕횡에게 패배해서 오이라트의 선봉대만 수백명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명나라의 화기맛을 본 에센은 12일은 우선 머뭇거리다가, 13일에 화기 사용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자 정찰대를 보내었습니다. 이에 우겸은 한술 더떠 덕승문 쪽으로 포병대를 보내, 빈 집에 배치했습니다. 집 안에 있으니 비바람이 몰아쳐도 화기 사용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에센은 유인에 걸려들어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자신의 동생을 비롯한 오이라트의 수많은 지휘관들이 사망했습니다.



당황한 에센은 이 문, 저 문을 모두 공격해보았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격, 깔려있는 장애물들, 요소요소에서 기습을 하는 명나라 군사들 때문에 전혀 돌파구를 찾지 못헀습니다. 어리석은 환관들이 중간에 공을 세워보기 위해 설치다가 당해 한 때 명군에 위기가 찾아오기는 했으나,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북경뿐만 아니라 다른곳에 보냈던 오이라트 군대도 명군의 어마어마한 화기에 밀려버렸고, 이렇게 시간이 가는 사이 중국 전 지역에서 수십, 수백만의 지원군이 파도처럼 북경으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시기를 놓쳤다 싶은 에센은 15일 결국 퇴각하였고, 이 기회를 노린 명나라는 마지막으로 화기를 사용하며 크게 역습을 가했습니다. 에센은 중국을 정복한 위대한 정복자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포로로 잡은 정통제를 어떻게든 협상의 패로 써보려고 했지만, 명나라의 반응은 '필요 없다' 는 단호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결국 에센은 아무 조건 없이 정통제를 풀어주고 귀환 했습니다.


정통제와 우겸의 후일담도 만만찮은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에센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토목보의 변' 이후, 절대적인 영광을 얻은 그는 1453년, 그동안 칭기스칸 가문의 적통만이 주장하던 '칸'의 지위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재앙이 되어 군 사령관들의 반란으로 1455년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위대한 '칸'이었던 에센의 죽음 이후 오이라트는 잠시 오르콘 강으로 물러나 서북 변방의 위협으로 남았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잠시 동안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있던 타타르가 기세를 떨치며, 알탄 칸의 시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굳이 여기서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들어서고. 이제 다시 오이라트는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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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13/07/04 23:00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만약 명이 몽골에 대한 위협을 대처하기 보다는 남경중심의 정부를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계속 하게 됩니다.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청조와 지금의 중국이 없었을 수도 있고, 또는 선진문물을 통한 해양국가로서의 취지로 부상했을 수도 있고 말이지요.
13/07/05 08:11
수정 아이콘
양자강 이남과 이북은 인구차이가 많고 문화도,문벌도 다르고, 이민족들도 화남은 점점히 뿌려져 있어서. 남조들은 악전고투하다 다 망했죠
13/07/04 23:1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설탕가루인형형
13/07/05 17:54
수정 아이콘
뭔가 스펙타클하네요.
러시아-청나라-몽고-명나라-조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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