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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코프 유전을 점령하는 데 실패한 제1기갑군은 마이코프 동쪽의 유전인 그로즈니 유전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심각할 정도로 전투력이 약화되어 가던 제1기갑군에게 있어서 그로즈니 유전 점령은 결국에는 무리였고, 유전으로 가는 길목인 블라디캅카스에서 발목이 붙잡혀서 끝내 유전을 점령하는 데 실패합니다(설령 그로즈니까지 진격했어도 소련군이 유전을 가만 놔둘 리 없었습니다만). 한편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체첸 사람들이 독일군에게 저항했으나, 그들에게 따라온 것은 독일에게 부역했다는 억울한 누명뿐이었고, 소련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1944년부터 이들은 강제로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당하고 맙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지난주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펑크가 났습니다. 죄송합니다. 연재에 펑크를 내는 작가들 심정을 좀 알 것 같긴 하더군요.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느낀 것은, 11월 초까지 제1기갑군이 캅카스를 그야말로 아주 휘젓고 다니는 동안 B집단군은 뭘 했나 싶을 정도로 진군이 느렸다는 것입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가 어디 뭐 북한의 삼수갑산마냥 코딱지만한 작은 도시도 아니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갈라먹을 당시 인구가 벌써 45만에 달했습니다. 2017년 현재 인구도 (감소추세기는 하지만) 백만이 넘는 도시죠. 전쟁의 참화를 입은 도시를 인구순으로 써 보면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 - 로스토프나도누(이하 로스토프) -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 보로네시 순이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결국 점령에 실패했고 로스토프는 1941년에 일시 점령했다 밀려난 후 8개월 만에 다시 독일군이 접수한 도시임을 생각해 보면 스탈린그라드도 결코 만만한 도시는 아니었던 셈이죠.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앞에는 돈 강이라는 상당히 큰 자연 방어선이 있었습니다. 강폭이 아주 넓은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아니, 몇백 미터 정도였으니 넓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강이라는 존재 자체가 방어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는 매우 자명했죠. 게다가 캅카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일대의 철도망도 참으로 엉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보시다시피 그냥 텅텅 비어 있죠(심지어 이게 2017년 지도인데도). 동쪽의 볼고그라드에서 북상하는 철로가 있기는 한데, 저 철로를 안정적으로 사용하려면 보로네시를 완전 점령하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보로네시에서 한참 동쪽에 있는(약 150 km 정도) 철도 결절점을 아무런 이상 없이 지켜야 하며 그 라인을 파르티잔으로부터 철저히 지켜야... 벌써부터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 않습니까? 직접 지도를 보시면 더욱 이해가 빠르실 것 같군요.
방금 지도와의 축척 차이가 거의 두 배쯤 되는 지도죠. 보로네시를 나오게 하느라고 위쪽으로 올린 건데, 로스토프는 지도 가장 남쪽의 샤흐티(Shakhty)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하여간 이런 판이니 독일군이 보급 문제로 골머리를 심각하게 썩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련군이라고 해서 딱히 상태가 나았던 것도 아닌 것이, 누차 말하지만 주력부대는 북쪽으로 빠진 상황에서 이미 전투력의 손실은 막심했고, 방어선은 엉성했죠. 이런 걸 보면 어쩌면 전쟁이라는 것은 서로 어려움과 어려움의 싸움이 아닌가, 즉 다시 말해서 누가 그 어려움이라는 것을 더 잘 컨트롤하며 싸워 나가는가에 따라서 승패가 갈리는 것이 전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로스토프가 넘어간 그 시점에 즈음하여 B집단군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공격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독일군의 진군에서 지도를 확대해 보면 nd, md, Md 이렇게 되어 있으신 걸 보실 수 있는데... n은 키릴 문자의 П(Pe, 뻬)를 이탤릭으로 쓸 때 저렇게 쓰고, m은 키릴 문자의 Т(Te, 떼)를 이탤릭으로 쓴 겁니다. 그러니까 저걸 로마자로 바꾸면 PD, TD, MD가 되죠. PD는 Pekhotnaya Diviziya(Infanterie-Division, 보병사단), TD는 Tankovaya Diviziya(Panzer-Division, 전차사단), MD는 Motorizovannaya Diviziya(Motorized Division, 차량화사단). 근데 제1기갑사단이면 1 TD라 쓰지 TD-1이라고 쓰지는 않거든요. 더구나 제1기갑사단이 저렇게 산개되어 있을 리도 없는데다가 제1기갑사단은 이 당시 중부 집단군의 제9군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1개의 기갑사단이라고 보셔야 할 것 같네요. 같은 방식으로 PD-6은 6개의 보병사단. 이 편이 좀더 어귀가 맞죠.
어쨌든 7월 23일에 돈 강 서부의 남은 소련군을 밀어붙이기 위해 북쪽에서 공세를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북쪽의 철길을 따라 가운데에서 7월 26일에, 남쪽의 철길을 따라 남쪽에서 7월 31일에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소련군도 없는 병력을 짜내서 7월 27일에 북쪽에서 제1전차군과 제4전차군이 달려들었습니다만 공격의 우선순위가 남쪽에 있던 독일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7월 말이 되자 이들은 그로기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독일군 역시 결코 쉬운 진군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측면이 문제였죠. 보셨다시피 돈 강의 측면부는 철도 하나 없는 그야말로 벌판 그 자체였는데, 이 측면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독일군이 아닌 독일군의 동맹군들이었으며, 게다가 이들 역시 병력 충원에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결국 강을 따라 동맹군을 배치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통에 진군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죠. 지나치게 앞으로 튀어나갔다가는 잘라먹힐 판이었으니 "일단정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추축국군은 인력과 물자 보급에서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도 그런 상태에서 독일군은 조금씩 소련군을 동쪽으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북쪽의 측면을 이탈리아 및 루마니아군에게 맡기고, 독일군 제6군의 주력부대는 8월 23일에 소련군 제1전차군과 제4전차군을 박살내며 스탈린그라드 코앞으로 진군해 갔습니다. 남쪽에서도 루마니아 제7기병군단이 남쪽을 휘젓는 동안 남쪽의 주력부대가 소련군 제57군과 제64군 사이를 뚫고 스탈린그라드 외곽으로 진군했죠. 이 8월 23일에 독일군이 돈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했고 볼가 강의 북쪽을 향해 진군했으며 독일 공군이 최초로 소이탄 공격을 날렸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시작을 바로 이 날로 봅니다.
북쪽이 정리되고 나자 마침내 시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제6군은 이미 볼가 강에 도달해 있었고, 남쪽에서도 독일군이 볼가 강 방면을 접수하여, 9월 1일이 되자 스탈린그라드의 육로는 모두 차단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탈린그라드에 병력 증원을 하기 위해서는 볼가 강을 건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효율도 무척이나 나빴지만 독일 공군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고 더구나 독일군 포병까지 있어서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도 소련군은 정말로 피를 피로 덮어가며 싸웠습니다. 독일군 역시 가용한 모든 병력을 스탈린그라드에 투입했죠. 사실, 이렇게까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 몰빵을 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데이비드 글랜츠 역시 그의 저서에서 진격을 거듭할수록 목표가 불확실해졌다고 지적한 바 있죠. 아마도 그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하거니와, 상징적인 의미, 게다가 확실하게 볼가 강의 수운을 틀어쥘 수 있다는 전략적인 매력이 독일군, 정확히 말하면 히틀러의 눈을 가린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까지 많은 병력을 투입해 가면서 점령할 가치가 있는 도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건 선전 효과라는 것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죠.
이미 캅카스에서 마이코프 유전을 접수하는 데 실패한 이상 볼가 강 방면으로의 더 이상의 공격은 의미가 없었고, 스탈린그라드의 남쪽을 독일군이 접수하면서 볼가 강 이남의 캅카스 지역으로 병력을 보낼 소련군의 움직임을 차단하며 스탈린그라드의 공업 생산 능력을 박살낸다는 전략적 목표도 이미 달성한 이상(독일 공군도 있었고, 거리가 거리인지라 포병으로 갈겨대면 그만이기도 했죠) 사실 독일군은 여기에서 전선을 좀 안정화하고 취약한 측면을 보강하며 남쪽 내지는 다른 전역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전략적으로는 좀더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모양새가 안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실제로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저술한 안토니 비버는 이 단 한 문장으로 히틀러의 심리를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이 위험한 몽상가는 현실에 대한 보상으로 상징적 승리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하여간 소련군이 핀치에 몰려 있던 것은 사실이라 9월 중순에는 그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는 파울루스마저 2주 내로 스탈린그라드를 완전 점령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고, 스탈린 역시도 거의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여러 모로 9월 12일은 운명적인 날이었습니다. 독일군이 "최종적인" 공세를 기획하고 개시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일부 부대를 볼가 강 동쪽으로 빼돌리던 소련군 제62군의 안톤 로파틴이 경질되고... 아마도 독소전쟁에 등장한 사령관들 중 가장 용맹한 장군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등장한 것이죠.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
그리고 이 날,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가 스탈린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상세한 것은 다음 주에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하여간에 건물 바이 건물, 스텝 바이 스텝으로 가지고 있는 병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가며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의 모든 건물을, 문자 그대로 모든 건물을 점령하고 박살내기 위해 진군해 갔고, 소련군 역시도 3일 만에 인원의 90%가 사상자로 변하는 사단이 나올 정도로 처절하게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볼가 강 끝까지 밀어붙였고, 이제 소련군과 볼가 강 사이에 남은 거리는 불과 100여 m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00 m... 참으로 짧은 거리죠. 국회의사당 거리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의 거리가 300 m이니 그 1/3. KTX 객차 다섯 개 정도를 늘어놓으면 그게 100 m가 조금 넘는다는군요. 소련군에게 남은 땅이 그 정도였다는 겁니다. 기가 막히죠. 그렇게 좁은 지역에서 엄청난 병력들이 뒤엉키고, 싸우고, 또 피를 흘리며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름 끼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소련군은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적적으로 두 달을 버텨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때의 전장 지도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양군이 가능한 모든 것을 털어넣어 가며 싸우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