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먹던 컵볶이는 500원이면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 거의 2만원을 내야지 떡볶이를 먹을 수 있게 되었죠. 만드는 방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런 의문에서 떡볶이를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미리 말씀드릴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흐름에서 궁중 떡볶이가 즉석 떡볶이가 되고 매운 떡볶이가 등장하게 되었는 지는 알 수 있게 될 거예요.
Fig.1 가래떡의 등장 우리나라는 떡의 역사는 깁니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에서도 곡식을 가는 도구와 찜을 위한 시루를 찾아볼 수 있죠. 특히 가래떡은 기본적인 재료와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초기에 등장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하지만 정확하게 등장하는 것은 1770년의 <경도잡지>에서 “멥쌀로 떡을 만드는데, 치고 비벼 한 가닥으로 만든다”라는 기록이 최초이죠.
Fig.2 궁중 떡볶이
[Figure.1 간장 베이스의 궁중 떡볶이 ⓒ우리의 식탁]
떡볶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595년 <겸암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병자*餠炙* 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요. 제사 의례상에 올리는 음식이었죠.
구체적인 요리법은 <부인필지>, <주식시의>, <규곤요람>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각 책 별로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떡볶이는 떡과 야채와 해산물 혹은 소고기를 간장 양념으로 볶은 요리였죠. 물론 밀가루와 해산물, 소고기 등은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한 음식이었어요.
1930년대 노래인 <오빠는 풍각쟁이>에서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고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라는 가사를 통해 떡볶이가 귀한 음식임을 확인 할 수 있죠.
Fig.3 통인시장의 기름 떡볶이
[Figure.2 통인동 기름떡볶이 원조, 김정연 할머니 ⓒMBC]
6·25전쟁 이후 서촌 지역에 피난민이 모이면서 통인시장이 형성되는데요. 이곳에 김정연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김정연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개성에서 잠시 서울로 내려왔다가 전쟁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죠. 그리고 생계를 위해 1958년부터 기름떡볶이를 판매합니다. 기름떡볶이는 뜨겁게 달군 무쇠 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아 만드는데요. 간장 양념의 간장떡볶이와 고춧가루 양념의 기름떡볶이 두 종류가 있죠. 2015년에 별세하시기 전까지 기름떡볶이를 판매하셨죠.
통인시장에는 꽤 많은 기름떡볶이집이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자작한 국물 떡볶이가 흥행하면서 많은 집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Fig.4 신당동 마복림 할머니 즉석떡볶이
[Figure.3 마복림 할머니의 순창 고추장 CF]
통인시장에 김정연 할머니가 계셨다면 신당동에는 마복림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마복림 할머니는 6·25전쟁 이후 1953년부터 떡볶이를 판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무엇보다 빨간 국물 떡볶이를 처음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죠.
빨간 국물 떡볶이를 개발하게 된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복림 할머니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중국 음식점을 찾게 되었는데요. 귀한 음식인 탓에 본인은 중국 요리에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개업식 공짜 떡으로 배를 채우려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실수로 자장면 그릇에 떡을 빠뜨렸는데, 자장면 양념이 묻은 떡이 생각보다 맛이 좋아 이를 계기로 춘장을 이용한 자신만의 떡볶이를 만들기 시작하죠.
마복림 할머니의 떡볶이는 연탄불에 냄비를 얹고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와 떡 등을 넣어 끓인 것이었는데요. 이 새로운 떡볶이는 인근 학교의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게 되죠. 시간이 지나면서 들어가는 부재료들이 다양해집니다. 라면 사리, 쫄면 사리, 달걀, 만두, 튀김 등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70년대에는 어묵과 양배추가 추가되었죠.
마복림 할머니의 떡볶이 가게가 잘되면서 인근에 비슷한 가게들이 생기고 떡볶이 골목이 만들어지는데요.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성행하는 데에는 야구가 한몫했습니다. 1960년대는 고교야구, 1982년에는 프로야구 출범하면서 동대문 운동장에 많은 인파가 몰렸거든요. 덩달아 경기가 끝나면 동대문 근처에 있던 신당동으로 떡볶이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도 늘었고요.
1996년에는 마복림 할머니가 순창 고추장 TV 광고에 출연해 ‘고추장 비밀은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라는 대사를 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집니다. 마복림 할머니는 2011년에 별세하셨지만 며느리가 이어받아 현재도 운영 중이죠.
Fig.5 학생들의 소울 푸드
[신당동 떡볶이집의 DJ ⓒ연합뉴스]
신당동 즉석떡볶이가 유행하면서 차별화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떡볶이 가게가 등장하는데요. 바로 DJ가 있는 떡볶이 가게였습니다. 다방에 고등학생 출입이 금지되어 갈 곳이 없어진 고등학생들의 수요에 맞춘 것이었죠.
이처럼 떡볶이는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고 학생의 수도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떡볶이 가게들은 학교 앞에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90년대 초반생들까지 기억하는 포장마차 떡볶이집이 생겨난 것이었죠. 하지만 학생 인구가 줄면서 문방구와 함께 급속도로 사라지게 됩니다.
Fig.6 프랜차이즈의 시작 - 신전떡볶이, 아딸, 엽떡 떡볶이는 학교 앞 길거리 노점이나 김가네나 김밥천국 등 분식 프랜차이즈 등에서 판매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요. 2000년대를 기점으로 프랜차이즈 떡볶이집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1999년에 등장한 신전떡볶이와 2002년의 아딸과 동대문 엽기떡볶이가 있죠.
[Figure.5 신점떡볶이 ⓒ네이버 블로그 Flex-]
①신전떡볶이
신전떡볶이를 창업한 하성호 대표는 갓 군대를 전역한 1999년 대구 칠성동에서 신전떡볶이를 창업해 직접 배달하며 신전떡볶이를 운영하는데요. 입소문이 나 2003년 대구 동성로에 2호점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2호점이 대박 나면서 급성장하죠.
신전떡볶이의 전략은 매운 떡볶이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을 공략하는 것이었는데요. 문제는 너무 매워서 2014년 서울 진출할 때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는 매운맛만 2가지였는데 순한 맛을 추가했다고 하죠.
[Figure.6 아딸 매장 ⓒ한겨레]
②아딸
아딸(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시작은 꽤 장대합니다. 파주 미군기지에서 물품을 배달하던 이영석 대표가 우연한 기회에 미군 부대에서 튀김 기술을 전수받게 되는데요. 이 기술을 가지고 1972년 문산튀김집이란 가게를 차리고 꽤 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이영석 대표의 딸인 이현경 대표와 사위인 이경수 대표가 2000년 서울 금호동에 자유시간이란 8평짜리 분식집을 개업하게 되죠. 처음에는 평범했던 분식집이었는데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서 가업을 잇는 장인과 딸 부부라고 소개되면서 하룻밤 사이에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고, 문의 전화가 쇄도해서 전화기 코드를 뽑고 영업할 정도였다고 하죠.
인기에 힘입어 2002년 이화여대 입구에 가게를 확장해서 내는데, 이대생들의 핫플레이스가 되며 성공하게 됩니다. 계속된 성공을 발판으로 2002년 5월부턴 프랜차이즈를 본격화하기 시작하죠.
아딸은 이경수 대표가 전면적으로 언론에 나서 착한 기업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왔는데요. 자서전에서도 사회기부 등을 이야기하며 착한 경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015년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랜차이즈 업체를 대대적으로 수사할 당시, 아딸이 2008년부터 4년 동안 식자재 업자들에게서 61억 원을 받고 회삿돈 8억 8천만 원을 빼돌린 혐의가 밝혀지며 징역 2년 6개월에 추징금 27억 3천만 원을 선고받았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창업주 부부가 이혼소송을 진행하면서 상표권 소송에 들어갑니다. 결국 상표권 소송에서 부인이 이겨서 대부분의 아딸 매장은 아딸이란 명칭은 못쓰게 되고 ‘감탄 떡볶이’로 바뀌게 됩니다. 현재는 감탄 떡볶이와 아딸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죠.
[Figure.7 엽기떡볶이 본점 ⓒ네이버 블로그 일상 공유 블로그!]
③동대문 엽기떡볶이
동대문 엽기떡볶이의 금주영 대표는 원래 동대문 의류회사에서 상품기획자로 일했었는데요. 90년대 중반 의류 도매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나버렸죠.
재기할 아이템을 찾던 그는 술안주로 먹던 불닭발을 생각하게 됩니다. 동대문 시장을 찾는 여성들이 매운맛을 좋아했었던 것이 떠올랐거든요. 2002년 동대문 중앙시장에 배달 전문으로 가게를 내고, 입소문을 타면서 순조롭게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죠. 하지만 또다시 2003년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며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출이 크게 줄지 않았어요. 알고 보니 닭발이 아닌 사이드 메뉴인 ‘엽기떡볶이’의 매출이 60%였기 때문이었죠. 이후 떡볶이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동대문 엽기떡볶이의 정식 명칭이 ‘불닭발땡초동대문엽기떡볶이’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죠.
Fig.7 2세대 프랜차이즈 - 죠스, 국대, 두끼
2008년에는 이명박 정부의 한식 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떡볶이 산업 육성 T/F가 구성되었고, 농림수산식품부에서도 감소하는 쌀 소비량을 늘리기 위해서 떡볶이 산업 육성 예산을 책정하는데요. 이러한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국대떡볶이 등 프랜차이즈 업체 24곳이 생기고, 가맹 점포 수도 2배 이상 증가해 2,203개가 생깁니다.
[Figure.8 죠스떡볶이 고려대점 ⓒmoneys.co.kr]
①죠스 떡볶이 죠스 떡볶이를 창업한 나상균 대표는 이전에도 핫도그 푸드트럭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고, 애완동물용품 사업으로 성공도 거두었죠.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어요. 이후에는 미국 유학을 꿈꾸었는데요. 유학 생활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죠스 떡볶이였죠.
죠스 떡볶이는 2007년 고려대 앞에서 장사를 시작하는데요. 떡볶이, 순대, 튀김, 어묵으로 단순화된 메뉴와 양질의 식자재 사용, 위생적인 매장환경 등으로 차별화를 주어 성공하죠.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에는 각종 협찬과 이벤트를 통한 모바일 기프티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이 역시 다른 떡볶이 브랜드와는 차별화되는 모습이었죠.
[Figure.9 국대떡볶이 매장 ⓒ국대FNB]
②국대 떡볶이
창업주 김상현 대표의 이력이 특이한데요. 대구대 체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국제경영학을 전공하고 군고구마 장사, 신발 장사, 호프집 서빙, 주류 배달업, 한인 음식점 배달업 등을 하고 한국에서 의류업을 하다 실패했죠.
이후 대구 한 떡볶이집 비법을 전수받아 2008년 이대 앞에 태극기를 내걸고 무허가 노점을 열어 영업을 시작합니다. 이게 대박이 나 이듬해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국대떡볶이 1호점을 오픈하죠. 국대 떡볶이는 오픈 직후 월 매출 1,000만 원을 돌파하고 사업을 넓혀갑니다.
국대떡볶이는 10~30대 여성들을 겨냥했는데요. 그래서 깔끔한 인테리어를 갖추고 젊은 남성 직원들을 고용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Figure.10 두끼 고려대점 ⓒ네이버 블로그 평데평마]
????두끼
국대 떡볶이 이후로 시들했던 떡볶이 열풍은 두끼를 필두로한 즉석떡볶이 프랜차이즈가 등장하면서 다시 불게 됩니다. 2014년 고려대 앞에 1호점을 런칭한 두끼는 무한리필 뷔페형 콘셉트와 즉석떡볶이로 차별화에 성공해 10~20대에게 인기를 얻었죠.
두끼의 창업자인 김관훈 대표는 현대오일뱅크에서 7년간 근무했지만 일에 의욕이 없이 마지못해 다니고 있었어요. 그러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떡볶이였죠. 회사에 다니면서 네이버 카페 ‘떡볶이의 모든 것’을 운영하기도 했는데요. 2011년 7월 개설 이후 카페 회원들과 전국 떡볶이 맛집 3,000여 곳을 찾아다녔죠.
김관훈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요리학원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꼬마가 핫바를 먹는 것을 보고 당시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던 부산의 삼진어묵으로 가서 어묵 핫바에 대한 투자 설명회를 하죠. 삼진어묵 측에서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떡볶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하게 되었어요.
두끼는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시작해서 2015년부터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진행해 왔는데요. 현재 베트남, 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에 가맹점을 두고 있죠.
Insight. 떡볶이는 장사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투영되는 것 같습니다. 기름 떡볶이에는 김정연 할머니의 인정 넘치는 모습, 신당동 즉석 떡볶이에는 마복림 할머니의 장난스러운 모습, 아딸에는 대표에 대한 배신감... 뭐 다르게 말하면 오너 리스크가 확실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떡볶이는 가게마다 맛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장모님께서 아딸 하셨었는데 돈을 갈퀴로 쓸어 모으셨어요
정말 회사 때려치고 장모님 밑에서 떡볶이나 만들까 고민 될 정도였는데...
경쟁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브랜드 이미지 나빠지니 한순간이더군요
매출이 반토막 났어도 매우 괜찮은 수입이었는데... 만족을 못하시고 접고 다른걸 벌이시자마자 코로나가 뙇!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한명으로 지역과 동네마다 떡볶이는 지역과 동네만의 특징이 있다고 봅니다
이 동네는 이런 맛의 이런 타입의 떡볶이고 요 동네는 요런 맛의 요런 타입의 떡볶이고
동네마다 개성이 있지만 그래도 내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동네의 떡볶이가 가장 맛있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건 동네 떡볶이 집들이 사라지거나 프랜차이즈로 바뀌면서 지역과 동네만의 특징도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저의 취향 때문인지 저는 신당동 떡볶이 집은 아직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인터넷 시대가 되어서 좋은게 동네의 떡볶이 집들의 정보가 공유되는거 입니다
초등학교 등학교길에 여중여고가 있었는데, 하교때마다 여중여고생 누나들이 따닥따닥 붙어 서서 떡볶이를 먹는 모습을 보며 집에 갔습니다. 정말 빈틈없이 나란히 서 있어서 등짝만 보이고 그 너머가 안 보였었어요. 그래서 여자형제가 없음에도 여자에 대한 환상을 다행이 일찍 버릴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 때 호프집 같은데서 만몇천원하는 떡볶이를 팔면 ‘맛있긴 한데 저 돈 내고?’ 생각을 하지만 어느새 후루룩 먹고요. 형들이 쏠땐 고기나 치킨이지만 누나들에게 얻어먹을 땐 떡볶이가 자주 있었습니다.
성대쪽에 HOT떡볶이라 부르던 곳도 맛있었습니다. 정식 상호가 기억 안 나네요; 안에 HOT 포스터가 있었습니다.
가평역 내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서, 남이섬 안에 들고 들어가 먹을 때의 행복함도 기억나고요.
대학로 깻잎떡볶이를 사서 낙산공원까지 올라가서 달과 서울을 바라보며 먹을 때의 만족감도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