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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2/09/10 14:32:36
Name [GhOsT]No.1
Subject 젊은 그들 (펀글)
아마 첨 쓰셨던 분이..진산이라는 무협작가님이 쓰셨져...
꽤 감동적이였다는 오랜만에 생각나서 퍼왔습니다..ㅠㅠ
1~4편까지 있지만 통째로 옮겼씁니다..
길더라도.아침점심저녁먹고나서 식후 30분후에 조금씩 읽으면 될겁니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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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게이머

처음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겼을 때, 그리고 기사거리 찾아 눈을 번뜩이는 언론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들을 비춰주었을 때, 나는 회의했다.
생각없는 젊은 애들의 놀짓거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을 별로 신뢰를 하지 못해서였다. 게임을 좋아하고 열정을 불사르는 것은 그 젊은 친구들일지 몰라도, 거기에서 돈냄새를 맡고, 스포트 라이트를 비춰주고, 열광의 분위기를 조장하고, 자본을 투입했다가, 더 이상 돈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드는 순간 가차없이 - 그들의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썰물처럼 떠나가버릴 그 '기성의 논리'라는 것을 어느 만큼은 경외하고 어느 만큼은 혐오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나는 젊은 그들이 재주부르는 곰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젊은 세대들에게 주목 받고 있습니다' 라고 슬쩍 한 마디씩 내뱉었던 언론들이, 어느날 약간의 틈만 보이면 그들을 매도하고, 미래에 대한 설계도 착실한 생활 태도도 없는 인간 쓰레기라고 발길질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 손으로는 이벤트를 만들어 조명을 비춰주고, 다른 손으로는 뺨을 때리는 - .

프로게임이라는 것을 보는 내 시각은 얼마쯤 시니컬했고, 거기에 몸을 담은 캐스터나 해설자나 선수나 매니저나, 다 조금쯤은 삐딱한 시선으로 본 것이 사실이다. 저러다 조금만 지나면. 스타 열기만 사라지면 - 모든 잔치는 끝나고 상은 둘러엎어지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이 달라졌다. 그래, 나는 얼마쯤 젊은 그들에게 감동하고 있다. 갈수록 답답해져가는 30대를 넘어서는 고개에서, 나는 우습게도 몇몇의 스타 - 영웅들을 발견하고 만다. 그 스타(별)들은, 스타(크래프트)에서 왔다.

2. 스타들

스타라고 하면 흔히 연예인을 생각한다. 하지만 난 연예인에는 별 관심이 없다. 스포츠에도 별 관심이 없다. 무관심하므로 그들은 내게 별이 아니다.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나는 게임을 즐기고, 내가 하지 못한 무엇을 해내는 게이머들에게 약간의 경외감을 느낀다. 한때 박찬호나 박세리의 시합을 보면서 삶의 희망을 갖는 샐러리맨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해한다. 그리고 공감한다.
나보다 훨씬 어린 프로게이머들의 경기를 보며 일희일비하고,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빚어지는 역전극에서 쪽팔리지만 삶의 교훈 비슷한 것까지 느끼기 때문이다. 하루에 10시간 12시간씩 연습한다는 젊은 그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선수는 연습 그만큼 한다던데, 나도 일에 그 정도 시간은 바쳐야지!'하고 중학생 때나 느꼈음직한 우상 따라하기로 모자란 기력을 불태우는 순간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나는 임요환 선수를 좋아한다. 한동안 스타에 관심이 없어졌었다. 스타크래프트 열기 시들면, 프로게임이라는 것자체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테란을 좋아했지만 여기저기서 테란 암울하다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실제로 내가 해봐도 암울했다. (지만, 생각해 보면 종족의 암울성보다는 내 실력의 암울성이 '우주' 컸다) 에구, 해도 해도 안되는 스타에 매달리느니 롤 플레잉의 로망이나 느껴보자며 디아블로나 다른 게임들로 눈을 돌렸다. 하마터면 시들어버릴 뻔한 스타에 대한 관심을 되살려준 것은 바로 이 선수, 임요환이다.

과연 이 선수,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잡음도 꽤 많으니까. 듣자하니 안티 클럽도 있다고 하니 유명세 하나는 톡톡히 치르는 셈이다.
노골적이든, 혹은 은근히 내비치는 것이든 임요환 선수에 대한 평은 두 가지로 갈린다. 나쁜 쪽으로 이야기한다면 - 진검승부에 약하다 라든가, 변칙에만 능하다든가 - 좋은 쪽은 손이 빠르다, 맵을 넓게 본다, 순발력과 심리전에 능하다 든가. 테란의 황제니 살아있는 드랍쉽 같은 귀여운 닉네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그건 그야말로 닉네임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만, '테란의 황제'라면 스타크래프트 스토리에 나오는 아크투러스 멩스크가 아닌가 -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는 된다. 그는 황제로 등극하지 않았던가!)

임요환 선수의 vod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몇 번이나 감상해본 나로서는, 그의 동료선수들이, 혹은 냉정한 비판가들이 말하는 '진검승부에 약하다'는 지적에 일면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 나쁘게는 보지 않는다. 그의 변칙은 아오조라 김대기 선수의 변칙과는 다소 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김대기 선수의 변칙에는 로망이 있다. 그러나 임요환의 변칙에는 로망보다는 이기고 싶어하는 욕망이 보인다. 빈틈을 노리고 물고 들어가고 싶어하는 치열한 욕망 같은거 말이다. 진검승부에 약한 것은 그의 칼이 날카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무수한 실패를 반복하면서 차근차근 쌓아올린 승리의 리듬이라는 것이 아마도 '적의 의표를 찌르는 승부'에서 많이 찾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이기는 경험이라는 거, 굉장히 중요하다. 누구든 자기 일에서 잘 풀리는 순간의 '감'을 한 번 잡으면 한동안은 승승장구한다. 이걸 흔히 '물이 올랐다'고도 하고, 환타지 소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말로 하면 하하, 그래 아마 '마법의 가을'을 맞이했다 - 쯤이 아닐까?

정석은 물론 좋은 것이다. 왜 정석이 되었겠는가? 많은 플레이어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승리로 가는 최적화의 길을 찾아낸 것이 정석이다. 바둑을 배우려면 정석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정석만 가지고 먹고 사는 기사는 없다.
임요환의 플레이는 생각이 많은 플레이다. 어느 순간에는 감각적으로 싸우지만 감각 이전에 그는 '생각'하고 움직인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빅게임에서 많이 이겼기 때문에 그가 불패의 게이머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제법 진다. ^_^;; 그리고 이런 말 하면 내가 과연 그의 팬일까 의심스럽기도 한데, 놀랍게도 나는 그가 패배하는 게임조차 재미있다.
GG를 쳤어도 스무번은 더 쳤을 상황에서, 마지막 커맨드 센터나 배럭이 파괴될 때까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 그의 악바리 근성. 때문에 그의 승리는 극적일 때가 많고, 그의 패배는 테란의 황제니 뭐니 하는 닉네임이 무색할 정도로 비참할 때도 있다. 몰릴 데로 몰려 GG를 선언하는 그의 메시지가 화면에 뜨면, 가슴이 싸아하게 아프고, 또 묘하게 감동적이다.
그리고, 무지 쪽팔리는 얘기지만 - 그의 게임을 본 이후에는 살면서 약간 힘든 일이 생겨서 그야말로 'GG' 치고 싶을 때 임요환이라면 한 번쯤은 더, 라는 생각으로 한 번 더 힘을 내게 되곤 하는 것이다.

치밀하게 연구하고,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전술을 통해 승리를 맛본 경험이 임요환 선수에게는 가장 달콤한 것일지 모른다. 때문에 그는 많이 준비하는 시합에는 강하고, 그렇지 않은 시합에서는 어이없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팬의 입장에서 물론 그가 진짜 '불패'한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세상에는 타인을 향해 불패할 수 있는 존재란 없다. 장강의 앞물결은 늘 뒷물결에 밀려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늘 도전자에 열광한다. 도전자가 파란을 일으키며 예선을 통과하고 16강을 이기고 8강에 들고 4강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일구고 결승의 관문에 도착하기 까지, 도전자에게 쏟아지는 애정은 그야말로 뜨거울 정도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챔피언이 아니라 도전자의 입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단 챔피언이 되고나면 그 애정의 절반쯤은 떠나간다. 떠나간 절반은 새로운 도전자의 몫이다. 챔피언이 고독하다는 말은 괜히 생긴 것은 아니다. 이따금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제 그가 도전자였을 때 100의 사랑을 주고, 오늘 그가 챔피언일 때 50의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챔피언에게 100의 사랑을, 그리고 새로운 도전자에게는 또한 새로 생겨난 100의 사랑을 주는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파이란 키워져야 하는게 아닐까 하고. ^_^

나이로치자면 한참 아래인 이 젊은 청년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내 생각에는 그가 정말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혈관 깊숙이 아직도 도전자의 피가 그치지 않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끈기와 근성 같은것 말이다. 내가 임요환의 게임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것 세개를 꼽으라면, 물론 누구나 감동했을 그 장진남 선수와의 8강전 레가시 오브 차나 - 변성철 선수와의 역전승 같은 것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난 리그 박용욱 선수와의 4강전이다. 좀 더 좁혀서 말하자면, 4강전의 1, 2차전으로 이어지는 그 템포 때문에, 나는 '어, 잘하는 선수군' 이라는 생각에서 '좋아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예선전부터 연승행진을 달려왔고, 해설자들조차도 '이러다 임요환 선수 공식대회 연승 기록 깨는거 아닌가요'라는, 약간은 부담이 되었을 (기록 갱신이라는게 사실 참 얼마나 부담되는 일일까) 멘트들이 흘러나오던 중 - 악마의 프로토스 박용욱에게 그만 덜미를 잡히고 말았던 1차전.

그때 그의 분함 같은 것은 아무리 앳되 보이는 얼굴이고 표정관리에 신경을 썼다고 해도 - 화면을 통해 보는 나한테까지조차 마구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차전. 무시무시한 속도로 프로토스 진영을 향해 달려가는 임요환의 탱크들에서 나는 단지 '탱크'가 아니라 분노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은 전율했다.
'이야, 대체 누가 임요환 보고 힘싸움에서 밀린다고 해? 저거 봐. 시즈 모드 풀었다 조였다 하는 소리에서조차 열기가 팍팍 느껴지는구만!'
내 입에서는 절로 그런 소리가 나왔고, 내 눈에는 박용욱 선수의 기지가 탱크의 포화에 산화하는 것이 아니라 임요환의 기와 감정에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결정적으로 박용욱 선수의 메인 자리에 커맨드 센터를 짓는 걸 보고 나는 그가 정말 '감정'을 담아 게임을 했다고 느꼈다. 자신을 패배시킨 상대 선수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자신의 패배 그 자체에 분노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한테 화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건 대단히 센치한 감상이다. 지고 나서 상대한테 열 안받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임요환의 외모는 얌전하고 내성적인 소년처럼 보인다. 그는 어쩌면 내성적일지도 모르겠다. 내성적인 사람의 속이 더 뜨거운 경우가 많으니까. 내성적인 사람은 평소에 그걸 주변에 터뜨리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하는 힘이 더 클 수도 있다.
내성적인 사람이 착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 임요환은 착한 게이머가 절대 아니다. ^^;; (그래서 얼마쯤은 그를 경원하는 사람들,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가 간다) 박용욱 선수와의 게임을 보면서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이거였다.
'저 녀석, 정말 독하네.......'
인간적으로는 섬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다.

그가 일상적으로 그런 독기를 겉으로 폭발시키는 성격이라면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늘 폭발하는 타입은 아니다. 승리의 맛을 알면서 그는 냉정해져간다. 그 냉정함과 치밀함이 때로 센터 힘싸움에서 밀리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계략'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때 상대보다 훨씬 더 빨리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냉정한 승부사 임요환의 플레이를 좋아하는 것 만큼 박용욱과의 게임에서, 그리고 패배하는 게임의 마지막을 물고늘어지는 집념에서 보이는 그의 숨겨진 열정도 좋아하고, 그 두가지가 다 한데 모여 임요환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새로이 욱일승천하는 다른 게이머들에게 어느 사이엔가 신화의 왕좌를 내주고 물러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챔피언이기 때문에 그의 플레이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냉정함과 독함을 소유한 플레이어, 임요환. 빅게임에 강한 플레이어 임요환. 임요환 빠X이 빠X이라 칭해지는 그룹과, 임요환 안티라 칭해지는 그룹간의 말싸움은 짜증나는 이벤트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애들이 노는데 욕도 나오고 엄한 소리도 나오고 그럴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임요환 안티들 많은 사람이 제대로 표현은 못할지 몰라도, 나는 그들의 거부감 밑바닥에, 임요환 스타 만들기라는 분위기에 대한 거리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고, 논리다.

프레드릭 대전에서도 그렇고, 임요환이 승리한 빅게임에서도 그렇고, 솔직히 조금은 너무 임요환 쪽으로 향해지는 스포트 라이트가 강한게 아닌가 싶다. 그와 마주 앉는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내심 상처 받을 수도 있다. 임요환 앞에 서는 많은 선수들이 실력이라는 측면보다는 게임외적인 측면에서 페널티를 안고 있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게 임요환이 원했던 것이든 아니든간에 말이다. 그리고 그걸 의식하고 했든 아니든간에, 프로게임계가 보다 오래, 보다 잘 살아남기 위해 임요환이라는 스타를 필요로 하고 그 스타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내고자 애쓴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불공정한 스포트 라이트는 분명히 어떤 성과가 있다. 내가 그 증거다. 스타에 관심을 잃어가던 보통 게이머가, 임요환이라는 플레이어를 통해 다시 스타에 눈을 돌리고, 게임 채널을 찾아 헤매고, 지웠던 스타를 다시 깔고, 내가 해봐도 안되는 그 콘트롤에 감탄하며 다시 또 게임 이벤트를 찾아 헤맨다. 시간과 여건만 되면 유료 경기라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가면서.
스타라는 건 분명히 얼마쯤은 허상이고 조작이다. 하지만 그 허상과 조작이 빚어내는 파워라는 것은 분명히 현실적이다. 신주영에서 이기석으로 이어지는 스타의 스타들에 대해 물론 약간이라도 게임계 내부의 사정을 잘 아는 '매니아'들은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임요환에 대해서도.

하지만 스타의 효용성이란, 그게 꼭 '진실'해서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별'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별빛'을 사랑한다. 빛은 곧 별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별이 반사하는 허상일 뿐이다. 하지만 그 허상을 보고 우리는 길을 찾고, 밤을 밝힌다. 임요환의 스타성을 게임계가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분명히 한편 씁쓸한 일일테고, 그의 앞에 서서 불공정한 '스타와의 게임'을 치러야 하는 다른 선수들에게는 약간 울적한 일일 테지만, 별 하나로터 이득을 취하는 것은 그 별 자신만이 아니다. 그 별로 인해 나같은 어중이떠중이도 한번쯤 이쪽을 돌아보게 되고, 파이가 커지고, 자신도 그런 별이 되고 싶어하는 새내기들이 생겨나고 - 물론 부작용도 따르지만 그러면서 문화는 상처를 안고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는 임요환이라는 별도 떨어질 것이다. 스스로 내려오든지 (아아, 빌어먹을 놈의 군대!) 아니면 또 다른 별의 빛에 가려지든지. 그런 날들이 지나고 나면 지금 아옹다옹하는 애증 같은 것은 약간 맥이 빠질지도 모른다. 약간 쑥스럽고 흐뭇한 추억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지켜보는 우리들이야 그저 별들이 빛을 발하는 대로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며 일희일비할 뿐이지만, 함께 빛나는 다른 별들, 젊은 그들에게 나는 부탁하고 싶다. 임요환이라는 별이 불필요하다고는 하지 말자고. 그게 임요환이라서가 아니다. 누가 되었든 별은 필요하다. 나같은 어중이떠중이에게는 바라볼 빛이 필요한거다. 또 다른 별이 빛나주어도 좋다. 열정적인 팬이라면 자신의 별이 지는 것에 씁쓸해 하면서 처음 한동안은 투정도 부릴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 별이 뜨는 것도 좋아할 거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참 빨리도 챔피언을 잊는다) 그때, 바로 당신이, 지금 빛나는 별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 개성있게 더 확고하게 빛나주기를, 나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리고 아직 선수가 되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그래서 이 감동적인 '놀이판'을 우리가 계속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말이다.
약간은 비겁한 부탁일지 모르지만, 다소의 불공정함에 분노하지 말고 다 함께 놀 수 있는 미래의 판을 생각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들어서게 될지도 모를 왕좌에 기름칠을 해주는 기분으로 바라봐주기를. 통신동호회에서 아웅다웅하는 작은 판 말고 말이다. 나를 즐겁게 해주고 심지어 감동도 주는 젊은 그들이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얻고 멋진 인생을 구가하기를 나는 바란다. 한 플레이어로서 좋아하는 임요환과는 별개로, 지금 스타크래프트 판의 '스타'인 임요환이 프로게임계를 위해 그렇게 '이용'되어지기를 나는 조금은 희망한다.

그리고 다시 임요환이라는 플레이어에 대한 팬으로 돌아와서 , 난 임요환 선수가 스타를 하듯이 인생도 잘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집요하고 독하고 재기발랄하게, 그만의 방식으로. 스타에서 승리한 것 이상으로 인생에서도 승리하기를 정말 바란다. 게임만 잘하다가 게임계 시들해지니 같이 시드는 그런 꽃이 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 자신도 '이용'됨을 용납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고 약간은 안타깝게 수긍하고 만다.

그래서 한 게임 한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더라도, 프로게임계라는 좀 더 큰 전략적 국면에서 보면 누구도 패배하는 이 없이 다 같이 승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스타도 멀티 잘 뛰는 놈이 이기지 않던가. 프로게임계도, 지금은 멀티 뛰어야할 타이밍이다. 안에서 방어만 하면서 말라죽지 말자. 조금쯤은 상처를 동반하고 약간 썩은 냄새도 같이 날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원 많이 먹고 갈데까지 다 해보고 GG 치더라도 쳐야 하지 않겠는가.
2부
밤 하늘에 별이 하나만 있는게 아니다. 임요환이라는 별만 빛을 발하는게 아니다. 나는 때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선수를 무참하게 밟는 '내 눈에 새로 띈' 게이머에게 매료되고, 그를 통해서 임요환과는 다른 류의 빛을 본다. 파이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커지는 거다.

어쩌면 내가 임요환 이상으로 좋아한 - 분명히 시간으로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주목한 게이머가 있다. 바로 엔투루키 김동준 선수다. 게임큐에서 본 임요환과 김동준의 테테전 장시간 게임을 나는 좋아하는 소설을 몇 번이고 다시 들춰보듯이 이따금 열어본다. 아아, 정말 멋지다.

임요환에게 앞마당 조이기를 당한 시점에서 튀어나온 김동준의 벌처들이 임요환의 본진과 멀티를 향해 달릴 때 와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 시점에서 벌처는 벌처가 아니라 전부대 생존을 위한 필사의 임무를 띠고 출격하는 폭주족 특공대였다. -_-;; 이렇게 매력적인 플레이어가 또 세상에 어디 있을까? 얼굴 못생겨도 반할 만 하다. (그런데 못생긴 것도 아니다! 하늘은 실로 불공평하다)

김동준 선수를 좋아한 것은 스타에 일차 관심을 잃기 훨씬 전부터다. 어쩌면 스타에 그만 관심을 잃었던 짧은 별거기간은 김동준이라는 별이 내가 소망한 것만큼 빛나주지 않아 울적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중은 이렇게 우매한 것이다 ^_^)

프로게이머들, 다들 기가 막히게 잘한다. 선수들 따라 징크스가 있고, 서로 물고 물리는 천적관계도 있고, 어떤 스타일의 대회에 약하거나 강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슬럼프라는 것도 있고, 또 우리 젊은 별들이 한 해 한 해 나이가 먹어가면서 자기 인생의 앞날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을 하기도 해서 다소 흔들리는 시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들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다! 누구도 '허접'이니 '썩었다'느니 하는 소리 들을 사람들이 아니다.

김동준 선수는 그 중 각별히 보는 것만으로 '우와, 정말 잘하네'라는 느낌을 주는 특별한 선수다. 내 눈은 분명히 허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음 뭐랄까. 임요환 선수를 이겼거나, 이길 가능성이 있는 선수는 분명히 무수하게 많은데 - 임요환 VS 김동준에 대해서는 임요환 VS 타선수와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임요환이 다른 선수에게 싸울 때는 - 임요환이 일본도를 들었는데 상대는 거대한 해머나 바스타드 소드나, 아니면 머스킷 총으로 임요환을 눕혔다는 느낌이 든다. 비겁이니 이런 이야기가 절대 아니고, 두 용사가 맞붙었는데 서로 무기의 성질이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다.

반면, 김동준과 임요환의 승부는, 분명히 둘 다 같은 '칼'이라는 느낌이 든다. 굳이 비유하자면 김동준은 더 가늘고 날카로운 칼을 든 - 펜서 같은 느낌이다. 그 게임 감각, 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 아, 으아아아, 묘사가 너무 힘들다! 씩씩.. 이건 김동준이라는 별이 내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은데서 빛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엄한 탓을 일단 해보고)

어쨌든 나는 정말 김동준 선수 좋아하고, 그의 팬클럽 회원이고, 그가 스타 그만 두는 날까지 아무리 성적이 안 좋아도 절대 기대선수 목록에서 지우지 않을 거다. 그의 게임은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많은 선수들의 게임이 스타에서 공인되어진 '이기는 공식'을 착실하게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닐거고, 내가 게임 끝날때까지 하는 생각보다 보통 프로게이머가 SCV 한 마리 뽑으면서 하는 생각이 훨씬 더 많을 거다) 김동준의 게임은 임요환의 게임과 마찬가지로 상대와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 너 그렇게 했어? 그럼 나 이렇게 할래. 앗, 받아쳤어? 오케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드라마틱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 정말 좋은 선수다.

임요환이 승부욕 대단한 총사령관으로 느껴진다면, 김동준은 뭐랄까, 감각이 탁월한 야전사령관 같은 느낌이다. 몰아칠 때는 노한 광풍처럼 몰아치고 일어설 때는 불처럼 일어서고 버틸 때는 태산처럼 부동하는 것이 전략가의 덕목이라면, 김동준의 경우에는 광풍과 불은 되는데 태산이 조금 안되는게 아닐까 싶어서 늘 아쉽고 안타까웠다.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패하는게 김동준 같은 스타일이 아닐까. 대회운도 잘 안따르고 (라지만, 난 운보다는 이 탁월한 야사 타입의 게이머가 내면적으로 아직 극복하지 못한 뭔가가 초기부터 계속 작용하고 있는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꼭 운이 나빠서라기 보다는) 슬럼프도 있는 것 같은데, 긴 슬럼프는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김동준이라는 플레이어를 좀 더 큰 그릇으로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패배도 맛보고 아슬아슬한 승리도 맛보고, 긴장 넘치는 큰 대회도 '에라, 모 아니면 도지' 하는 식으로 즐길 수 있을 만큼의 경험도 주고, 게임계에 대한 생각도 하고, 게임과 함께 좀 더 성숙하고... 뭐 그런 시간을 누리는 동안에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훨씬 큰 별이 될지도 모른다.

김동준 선수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선수다. 만약 내가 바라는 대로 스타크래프트의 역사가 오래오래 이어져서 완전히 스포츠화되고, 선수의 생명도 좀 길어지고, 단지 어린 선수들의 발빠른 감각만이 아니라 인생의 산전수전을 맛본 (.. 그렇다고 3,40대가 하기는 어렵겠지만) 선수들의 노련미가 맵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김동준 선수의 그 재기발랄함은 훨씬 더 빛을 발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라고 싶다.

김동준 선수! 힘내요. 타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 오래될 수록 더 환하게 오래 타오를 수도 있는 겁니다. 게임 즐기고, 승부 즐기고, 본인의 장점은 포기하지 말고 단점만 약간 보완해서 훨훨 날아오르세요. 마우스줄 끊을 때까지 지켜볼 팬이 있습니다. ^_^;;


3부
노블 프로토스. 이 형용이 어울리는 프로토스 게이머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 IntotheRain (대소문자가 맞나 모르겠다) 임성춘을 꼽겠다. 게임큐에서 그의 아이디와, 그의 게임과, 그리고 그의 사진을 보았을 때 - 우앗, 어쩌면 이리이리 혼연일체가! 라는 생각이 들어 절로 감탄했다.

어디선가 본 이야기로는 그 아이디는 물려받은 거라고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참 정말 잘 어울리는 아이디다. 빗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질럿의 뒷모습에 서리는 사나이의 고독을 아는가, 그대는? ^_^

템플러라는 별명 또한 참으로 잘 어울린다. 스타크래프트의 히어로 중에 가장 정이 가는 것은 물론 테란의 레이너지만, 뭐랄까 - 가장 가슴 아리고 약간 우러러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역시 태서더이다. 오버마인드와 함께 자폭한 그의 장렬한 최후, 아흑.

나는 심지어 임성춘이 몰고 나오는 드라군 안에는 피닉스가 타고 있고, 그가 움직이는 캐리어 안에는 태서더가 타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약간 샛길로 빠져서 프로게이머의 외모를 이야기하자면, 임요환이 꽃미남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뭇 여성팬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하는데 비전문가인 내 눈에 임요환이고 임성춘이고 김동준이고 변성철이고 최인규고 장진남이고 기욤 패트리고 국기봉이고.... 에고에고 하나 같이 다 이쁘게만 보인다.

왜냐하면 정말 신기하게도 그들의 플레이 스타일과 그 외모에서 풍기는 맛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느낌 때문이다. 프로게이머의 외모는, 톡 까놓고 이야기해서 그냥 '잘' 생긴다고 땡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게이머는 게임으로 웅변하는 법. 비쥬얼의 시대이니 만치 그의 게임이 노래하는 바와 생김새가 하모니를 이룬다면 그것이 최고의 미남인 것이다.

힘싸움이 아닌 재기발랄함과 얼핏얼핏 보이는 숨겨진 독기는 임요환의 그 소년 같은 얼굴과 입매, 그리고 빅게임이 뜻대로 풀릴 때의 그 눈빛에서 잘 드러난다. 국기봉은 과연 연륜이 있는 플레이어라는 게 표정에서도 보인다. 장진남 선수가 결승전에서 임요환 선수에게 패할 때, 나는 그의 그 정말이지 귀엽기 그지 없는 (...) 얼굴을 보고, 또 그 얼굴로 '국가대표 저그 화이팅 - 세계 최강 저그 화이팅" (전라도 사투리로) 하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아직은 뭔가 게임이 안 풀릴 때 임요환 같은 '독기'가 바로 스며나오는 얼굴이 아니다. 아마 그런게 얼굴에 나타날 때쯤, 장진남 선수는 대단히 강한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강도경 선수의 얼굴에서는 그런게 보인다.

김대기 선수의 얼굴은 로망이 보이는 얼굴이다. 나는 그를 볼때마다 풍차를 향해 랜스를 곧추세우고 '자, 그럼 어디 한 번 붙어볼 테냐? 어느 날개를 부러뜨려줄까?'하고 씨익 쪼개는 - 같은 세대의 게이머들보다 뭔가 한 걸음쯤은 일선을 관조하는 것 같은 로망을 느낀다. 그의 엽기는, 어쩌면 장난기에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단순한 치기에서 비롯된 엽기는 아니다. 그는 봉토를 거느리고 군림하는 군주 타입이 아니라, 랜스 하나와 말 한 마리, 그리고 갑옷 한 벌을 달랑 걸치고 세상을 떠도는 프리랜서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고, 그런 얼굴이다.

김동준 선수의 얼굴은, 재능있고 똑똑하고 뭘 좀 아는 청년의 얼굴이다. 새로 자라나는 고등학생 게이머들에 비해, 그의 눈은 한 곳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슬럼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 극복할 수 있다면 (반드시 극복해주기를!), 그걸 극복한 얼굴을 보여준다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요즘 '얼굴'이 좋다고 느껴지는 게이머는 최인규, 김정민 두 선수다. 이 두 선수, 참 좋은 얼굴들인데다가 게임할 때 눈빛이 살아 있다. 외곬수 오따꾸의 눈이 아니다. 조금만 연륜이 더해지면 대세를 완전히 장악할 수도 있는 눈빛들이다. 감을 잡자마자 발동하는 선수도 있고 감잡고 한참 있어야 발동 걸리는 선수도 있다. 김정민 선수 탈락 확정되었다고 하지만, '얼굴'이 말하는 느낌으로는 분명히 뭔가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얼굴을 스스로 만든다고 한다. 프로게이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명실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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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즐이
02/09/10 14:52
수정 아이콘
이미 pgr에 소개된 글입니다. ^^ 스스로.. ^^;
[GhOsT]No.1
02/09/10 14:56
수정 아이콘
아..알고있어요 오랜된글이랑..혹시 다시 한 번 퍼온거데..ㅡㅡ;;
이글은 무려..pgr21의 자유게시판의..284쪽의 60번부터 63번글이져...그런데..항즐이님이나 오랜된 분들은 분명히 읽으셨겠지만 그이후에 가입하거나 그이후에 스타를 접하신분들에겐 이 글을 못 읽는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그래서 그러한 맘에 퍼온건데..ㅡㅡ
정 삭제 하시라구 하시면 하겠는데ㅡㅡ분명 못읽었떤 사람도 많을텐데..ㅠㅠ
02/09/10 14:56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다시봐도 감동적이네염...^^;
풀오름달
02/09/10 17:43
수정 아이콘
계속 가입은 안하고 글만 읽고 갔었는데... 이글 읽고 메모 남길려고 가입했네요^^ 예전에 진산님이 글 쓴게 있다는 말 들은거 같아서 함 읽어보고 싶었는데 어디서 어케 찾아야 되는지 몰라서 못 읽었거든요.. 이렇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진산님이 내신 책 [마님되는법]을 잼나게 읽었거든요. 거기에 스타얘기도 나오고 엄재경이라는 이름도 나와서 어찌나 반가웠던지... ㅋㅋㅋ
가끔 메모나 남기는 조용한 회원이 되겠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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