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일단 개인전 결승부터 이야기 해보면,
이번 리그 문호준에 대해서 자주 나오던 말이, 문호준이 박인수에 대해서 어렵게 생각하는 인상이 느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슨 인간적으로 어려워한다 이런게 아니라 선수로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겠느냐 이런 점 말입니다.
물론 아무리 문호준이 V11을 달성한 레전드라고 해도 참가하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한것도 아니고 이긴것 만큼 진적도 적지 않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카트 제일 잘하는 사람은 문호준." 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문호준 본인도 자신감이 엄청난 선수구요. 원래 이 선수 절대 겸손한 캐릭터도 아니고, 다 쓸어버린다는 식의 자신감 표출, 쇼맨쉽도 잘하는 선수입니다. 벌써 7년전 무렵의 인터뷰를 찾아 보면 이런 발언도 보입니다.
"지금의 나는 연습을 안 해도 결승까지 갈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 뜻대로 경기 시간을 늘이고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전과 달리 최근에는 퍼펙트 경기가 수월해져서 퍼펙트 경기를 많이 노리고 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는 vs 박인수 구도에서는 뭔가 좀 사린다는 듯한 느낌이 보이더군요. 그냥 사람들 감상만 그런게 아니라 문호준 선수와 친한 해설진들도 대회 중에 해설하면서 "문호준 선수가 겸손(?) 해졌다." 는 발언도 하고, 대회 관련 프로그램에 나와도 누가 우승할것 같냐는 말에 자동적으로 먼저 박인수 이름을 본인이 꺼내기도 했구요. 문호준의 라이벌이라거나 비슷한 최상급이라고 하는 선수들은 전에도 몇몇 있었지만, 박인수에 대해서는 뭔가 그냥 근본적으로 '카트를 제일 잘하는 것 같다' 는 포스가 워낙 강했습니다.
그리고 문호준은 이제 카트리그를 통해 더 이상 뭘 얻어낼 것은 거의 없는 선수입니다. 카트라이더 대회가 아직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문호준은 다 알고, 본인 방송도 영상 올라오면 조회수 수십만은 찍고 라이브 방송도 수천명은 보는 소위 대기업 스트리머가 되어서, 카트리그 상금이 아쉬운 형편도 아닙니다. 애초에 그 이전에도 LCK로 치면 선수들 나이제한 풀리는 17세 이전에 상금만 2억 모았던 선수이기도 하고.
반면에 잃을 수 있다면 잃을건 많은 입장이기도 했구요. 방송을 하건 뭘 하건 문호준이라는 인물의 가장 큰 매력가치는 '카트라이더를 제일 잘한다' 는 겁니다. '카트라이더를 가장 잘했었던 선수' 이고, 동시에 현재형으로도 '잘한다' 는 게 모두 공존하는 선수. 만약 지면 일단 '가장 잘한다' 는건 꺠집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10번 우승한 선수가 1번 졌다고 '가장 잘했다' 까지 사라지진 않죠. 그런데 사람이라는게 워낙 매정해서 한번 아우라가 사라지면, 그래서 위에 있던 사람을 한번 똥밭에 구르게 하면 온갖 조롱과 멸시가 따라오게 됩니다. 문호준 퇴물이다. 문호준 사실 시대 잘 만나서 꿀빨았다. 문호준 거만해서 별로지 않냐? 문호준 인성 쓰레기다. 문호준 빠는 xx들 있냐? 등등... 이기면 한번의 우승이지만, 지면 10번의 우승도 부정당할 수 있는 그런 상황.
그렇다고 아니뗀 굴뚝에 연기나랴는 말처럼 아무 전조도 없이 사람들이 미쳐서 그러진 않았을테고, 그만큼 박인수가 잘했고 기세가 하늘을 찔렀기에 그랬을 겁니다. 문호준 본인조차 어려워 하는 느낌이 있었고, 실제로 에이스 결정전에서도 열세를 보이며 졌습니다. 개인전에서 몇번 경험으로 앞서는 모습도 보였지만, 두번째 대결은 아예 버그 사고로 뭘 해보지도 못하고 지는 불운까지 겪었습니다.
통한의 사고.
박인수에 대한 어려움, 그런 부담감, 그리고 이번 리그가 정말 역대 대회 중에서도 팬 관중들이 많았는데, 그 수많은 팬들(여성팬들이 대다수)이 단적으로 말하면 문호준 한명 보려고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팬 10명 있으면 그중에 8명은 문호준 응원 푯말 들고 있는데, 거기서 허무하게 깨지면 얼마나 좌절스러울까 싶은 그런 느낌.
이런저런 중압감이 커서인지 경기 초반부터 문호준의 표정은 여지껏 본 것 중에서도 제일 어둡더군요. 본래 제스쳐, 쇼맨쉽도 엄청 많은 선수인데 그날은 그런것도 거의 없었구요. 실제로 나중에 본인이 인터뷰로도 초반에 엄청 긴장을 느꼈고 부담을 느꼈다고도 했고.
대회 중 문호준 개인화면 시점
그리고 문호준은 경기 내에서도 초반부터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수차례 반복하며 하위권으로 쳐졌습니다. 원래 80점제는 경험 많고 노련해서 포인트 관리에 노련한 문호준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막판 전까지는 계속 고생하고 어려움을 겪는 기억 밖에 없을 정도로 힘겨워 보였던 상황.
최강자 박인수는 진작에 천상계 놀이를 하며 1위 진출을 확정짓고 편안하게 즐기다시피 하면서 게임을 하고 있고, 현재 기량으로 문박과 함께 TOP 3라고 해도 무방할 유창현이 2위를 굳혀가며 다른 선수들과 한참 점수를 벌려가던 상황.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는데, 앞에 계신 팬들이, 괜찮다고 열심히 응원해주시는게 보여서, 내가 마음 다잡고 열심히 해야겠구나."
경기 후반인 13세트, 유창현은 여전히 엄청난 주행을 보이며 1위를 했고, 반전이 필요한 문호준은 여기서도 5위에 머물며 2위 유창현과 14점 차이가 나는 상황. 80점을 먼저 얻는 선수가 있으면 경기가 끝나는데 남은 기회도 이제 얼마 없었습니다.
14세트, 문호준은 뒷심을 발휘해서 1위를 하지만 박인수가 3등으로 5점을 획득하면서 72점이 되고, 다음 경기에서 1등을 하면 바로 경기가 끝날 수 있는 지점으로 몰립니다.
15세트, 문호준은 또다시 1위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 뒤로 유창현 - 박인수가 들어오면서 박인수는 다음 경기 5등만 해도 경기를 끝낼 수 있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만약 다음 경기 문호준이 1위를 한다고 해도 유창현이 2위를 한다면 81점으로 문호준보다 앞서기 때문에 박인수 - 유창현이 결승에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16세트 경기, 문호준은 1위를 달려나가지만 2위를 유창현이 따라붙고 있어서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아무리 문호준이 1위를 해도 유창현이 올라가는 상황.
그러나 카트라이더 리그의 저주 중에 하나인 '퍼플의 저주' (마지막 결승전에서 보라색인 선수는 우승 못한다)가 이 상항에 발생해서 거짓말처럼 문호준은 3세트만에 무려 14점 차이를 뒤집고 극적으로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그리고...이제 박인수와 일대일 대결. 그런데 이 박인수는 공식전 일대일 경기에서 당일 이전까지 14전 14승이라는 무적의 전적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팬들도 그렇고 박인재 감독 같은 관계자들의 예상도 그렇고 "차라리 박인수가 최종 라운드까지 못 올라가면 몰라도, 일단 올라간다면 그 누구도 박인수를 저지할 수 없을것이라는 예상이 주류였습니다.
그런 박인수의 우세 속에서 펼쳐진 1세트 월드 두바이 다운타운 트랙의 승부.
처음부터 두 선수가 치열하게 달리고, 전체적으로 박인수가 앞서는 가운데 문호준이 차분하게 뒤를 따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경기 중후반, 문호준이 박인수와의 충돌 끝에 사고가 나면서 급격히 경기가 말리게 됩니다.
그런데 위의 장면, 유심히 보시면 문호준의 카트가 박인수의 카트와 부딫히고, 그 여파로 문호준이 벽에 박치기 하기 이전, 박인수가 왼쪽 벽에 살짝 부딫히고 나오는게 보이실 겁니다. 그 반동으로 문호준은 오른쪽의 벽에 부딫히고, 반면 박인수는 왼쪽 벽치기 - 문호준 옆구리 치기 - 그 반동으로 유유히 빠져 나옵니다.
놀라운건 저 모든게 결코 운이 따라준 뽀록이 아니라 다 설계였다는 점. 박인수가 같은 세이비어스 동료인 유창현과 함께 평소에 엄청나게 반복 연습한 빌드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갈고 닦은 필살기에 제대로 당해버리며 1세트를 내주고 만 문호준.
역시 일대일에서 박인수를 이기는건 무리인가.. 싶은 상황에서 펼쳐진 2세트, 신화 신들의 세계 트랙.
그런데 문호준은 여기서부터 1세트와 전혀 다른 방식의 승부를 펼칩니다. 1세트에서는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한' 침착하게 박인수의 뒤를 따라가며 기회를 엿보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경주를 했다면, 2세트에서부터는 박인수와 사정없이 드잡이를 펼치면서 어떻게든 앞서나가기 위한 격렬한 승부를 펼칩니다.
그리고 경기가 중후반에 들어갈 무렵, 박인수가 문호준보다 약간 앞서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문호준은 여기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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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문호준 본인의 리뷰)
"여기서 인수가 앞을 잡았잖아요? 그런데 인수가 앞에 가는데, 나는 여기서 드래프트 부스터가 발동하기 직전이었어요. 윙윙하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받으면 가망이 없어 보였거든."
"그래서 차를 왼쪽으로 틀어요. 왼쪽으로 틀죠?"
"그리고 바로 여기서 드래프트를 받습니다."
"여기서 드래프트를 받으면 저기서 인코스 라인을 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드래프트를 받아요."
"그래서 안쪽으로 탁, 치고 밉니다." (이 과정에서 문호준의 카트와 박인수의 카트가 접촉이 일어나며 박인수의 카트가 좀 더 뒤뚱거림)
"드래프트를(그떄) 사용하면 이 라인이 가능해요."
인코스 라인을 파고 든 문호준의 카트가 좀 더 앞쪽으로 안정감 있게 착지하는 반면, 박인수의 카트는 뒤에서 뒤뚱거리며 더 늦게 내려오고, 착지하고 나서도 반동을 크게 받아 좀 더 튀어 오르느라 재차 주행이 늦어집니다.
그렇게 결승점을 눈 앞에 두고 멀찍하게 멀어지는 두 사람.
경기 영상만 보면 그냥 쭉 잘달리는 스피드 대결처럼 보이지만, 이 대결에서 문호준은 고작 1분이 좀 넘는 경주에서 무려 10초 뒤의 상황을 미리 예측해서 설계를 한 겁니다. 엄청난 연습과 경험이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 그렇게 문호준은 박인수에게 15전 만에 공식전 일대일 대결 첫 패배를 안겨줍니다.
그렇게 일대일이 된 상황에서 펼쳐진, 시리즈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3세트 승부. 차이나 서안 병마용 트랙에서 펼쳐집니다.
공격적인 성향의 박인수는 초반부터 문호준을 강하게 압박해서 충돌을 유도하지만, 문호준은 쉽사리 말려들지 않습니다.
이 병마용 트랙의 하이라이트 구간은 바로 '병마용' 부분으로, 복잡한 병마용 쪽에 진입하는 순간 조금의 실수나 접촉으로도 번지가 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구간입니다. 여기에 진입하면서 먼저 앞쪽을 잡은 문호준.
이때 문호준의 드래프트 부스터는 풀로 모여 있어서 총 3개 입니다.
직후, 문호준은 드래프트 부스터가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사용 합니다. 2개로 드래프트 부스터가 줄어든 상황.
박인수 역시 문호준이 드래프트 부스터를 재차 사용하는걸 뒤에서 지켜보면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호준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버립니다.
그리고 충돌한 박인수는 그대로 장외로 날아갑니다
이런 숨막히는 결승 무대에서 저런 과감한 스탑 작전을 걸기도 어려운데, 문호준은 여기에 스탑 작전을 걸기 전 일부러 드래프트 부스터를 사용하면서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부스터를 사용하고 충돌이 펼쳐지기 까지의 시간은 고작 1.3초 남짓한 간격. 그 1.3초의 간격을 잡아채기 위해서, 잘못하면 제껴지는건 물론이고 이후 추격전에서 부스터의 부재로 어려움에 처해야 하는 그 리스크를 모두 감수하는 선택을 내린 겁니다.
장외로 날아간 박인수는 엄청난 반응속도로 R키를 누르고 다시 회복해 문호준을 추격하지만 이미 문호준은 화면에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진 상황.
이 시점에서 문호준은 승리를 확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
이미 승부가 결정난것처럼 보인 상황에서 박인수는 주행 괴물의 명성 답게 인코스 라인을 괴물같이 파고들며 엄청난 기세로 추격을 했고, 그런 사고가 있었음에도 막판 두 사람의 차이는 거의 사라지고 맙니다. 보통 타임어택 영상 올릴때 사용하는 어택 빌드를 그대로 쓰면서 추격하는 상황.
뒤에서 박인수가 이렇게 쫒아오는걸 본 문호준은 실제로도 엄청난게 긴장했다고 하고, "또 스탑을 걸거나 위쪽에서 작업을 걸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나 자신을 믿고 달리자." 고 마음 먹고 박인수와 순수 주행으로 승부 합니다.
그리고 결국 간발의 차이로 승리한 문호준. 승리한 문호준 조차 "마지막 드래프트에 박인수가 조금만 더 좋은 타이밍을 잡았으면 내가 졌을 것." 이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추격전이었습니다.
이 승리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박인수를 상대로 일대일 승부에서 2연속 승리, 2대1 시리즈 우위를 가져온 문호준. 여기까지만 해도 엄청난 위업이지만, 3세트의 미친 추격전에서 보이듯 박인수는 괴물은 괴물이기에 끝낼 수 있을때 확실히 끝내야 합니다. 4세트를 지면 트랙 결정권이 박인수 쪽으로 넘어가기에 5세트로 가는건 더욱더 불리한 상황. 떄문에 자기가 트랙을 선택할 수 있는 4세트에, 문호준 본인이 선호하는 트랙에서 확실히 승부를 내야 했는데...
여기서 문호준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도검 구름의 협곡" 트랙을 고르는 선택을 내립니다.
이 도검 트랙은 박인수에게 여러모로 친숙한 트랙입니다. 박인수가 이름을 날린 듀얼 레이스 X에서, 박인수는 이 트랙에서 그야말로 최단 코스지만 너무나도 위험성이 높아서 연습 방에서나 하지 그 누구도 감히 리그에서 하려고 엄두도 못내던 소위 '팔각정 빌드' 를, 그것도 차의 덩치가 큰 편인 코튼 X를 사용해 구사한 적이 있습니다. 천하의 문호준조차도 "이건 완전 가오잡이 빌드다." 라고 할 정도로 왠만큼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면 하려고 안할짓을 대회에서 구사했으니...
또한 그냥 주행하는것만 봐도 박인수는 이 도검 트랙에 대해서 이해도가 다른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입니다. 1위인 박인수와 2위 선수의 차이가 2위 선수와 7위 선수의 차이와 비슷할 정도니...
박인수는 이날 이전까지 도검 트랙에서 에이스 결정정만 4번을 했고, 4번을 다 이겼습니다. 그 4번의 승부 중 유창현과 유영혁은 박인수를 상대로 '아예' 거리를 못 좁히며 따라잡지도 못했고, 이재혁 같은 선수와 어쩌다 한번 비비기를 시전했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 박인수의 뒷꽁무니만 쫒다가 시합이 끝나버렸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하리고는 이때 리그 중계하던 김대겸 해설조차 이 당시 문호준의 선택에 대해 "좀 오바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문호준의 선택은 놀라웠는데...
그러나 문호준은 4강 팀전에서 있었던 승부에서 펼쳐진, 이 사고로 어이없이 끝난 패배를 되돌려주겠다는 생각으로 도검 트랙을 선택했습니다. 복수를 위해 호랑이 굴에 제발로 뛰어들어간 상황.
경기가 시작하고, 예상되로 몇초 되지도 않아 박인수는 문호준보다 앞서 달려나갑니다.
초반부터 벌써 거리가 벌어지는 상황.
트랙의 3분의 1 정도를 지난 시점에서, 여전히 문호준은 박인수의 뒤만 보며 추격 중입니다.
이제 3분의 2를 지났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멀기만 합니다.
이제 결승점까지 10초도 남지 않은 상황, 시합 내내 박인수의 뒤만 따라가던 문호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왔습니다.
인코스로 파고들어가며 조금이라도 차이를 줄이고
다시 한번 인코스로 들어가며 조금 더 차이를 줄이고
그리고 결승점 직전 앞, 다시 한번 박인수의 왼쪽 인코스로 파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박인수가 우측 건축물과 부딫히며 결승점 통과 직전에 거짓말처럼 속도가 줄었고, 문호준은 이 시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박인수를 제끼며 마침내 3대1로 승리, 개인전 우승을 달성합니다.
그냥 보면 박인수의 실수였다고 보일수도 있지만, 두 선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최후의 순간까지도 치열한 접전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문호준이 드래프트 가속도를 이용해 박인수를 밀어버렸고, 이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
그냥 문호준이 박인수를 일대일 승부에서 이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변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그것도 박인수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트랙을 일부러 골라, 이전의 패배를 만회하며 복수에 성공하고 우승한다.... 정말 마이클 조던의 플루 게임, 웰텀 투 NBA 같은 일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드라마틱한 순간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박인수를 지도한적도 있는 박인재 감독 같은 사람도 "솔직히 박인수 팬들도 그거 보고 X나 멋있다고 생각할거다." 라고 하고, 원래 문호준 선수와 친분이 두터운 신종민 선수는 자기 경기도 아닌 문호준 선수의 도검 승리를 보고 감격에 겨워 대성통곡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짜고 쳐도 이게 가능한가 싶은 승리.
무려 12년 전, 불과 11살의 나이로 첫번째 우승을 달성했던 2007년의 문호준.
그리고 2019년, 23살의 나이에 달성한 통산 11번째 우승.
인터넷을 들락거리다가 네이버의 E스포츠 탭을 클릭해서 보다보면, 인기 있는 롤이나 오버워치 정도 외에는 (종종 오버워치도 포함이지만) 각종 리그 기사에서 흔하게 이런 댓글을 보게 됩니다.
"이런 좉망겜 누가 하누?"
"이런 게임도 프로가 있어?"
"응 망겜" "네다씹정공겜" 등등등...
서든어택 여성부에서 2연속 우승에 성공했다는 쿠거 게이밍이라는 팀의 선수가, 우승 소감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다음 시즌에도 계속 새로운 선수들이 나와서, 리그가 부디 없어지지 않고 꾸준이 이어지면 좋겠다." 라고 하는 기사를 봤습니다. 댓글에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딴겜도 프로가 있냐" "아직도 서든 하는 사람 있냐" 이런 정도의 반응. 그외에 가끔 나오는 클래시 로얄류 잡다한 게임들이야 말할것도 없고...
그런 댓글 보면서 굳이 내가 거기서 같이 드잡이나 춤판 벌이는 지경은 아니더라도, 그냥 왠지 마음 한켠이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얼마전까지의 카트리그도, 사실 별로 다를게 없었거든요. 관객이라고는 그냥 그날 경기 안나가는 선수들, 선수들 친구, 가족 등등만 1층에 좀 차고. 그러면서도 리그는 계속 열리고. 좀만 올라가면 바로 고인물 판이고 등등.... 그 모든 이야기가 카트라이더 리그에 적용해도 비수처럼 찍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카트리그에 있어서 문호준이라는 선수의 존재는, 참 뭐라고 할까요. 요즘 인터넷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따지면 소위 '근본력' 이라고 할까요? 그런걸 가져다 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카트리그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지금 카트라이더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카트 같은 X망겜 누가 하냐, 아직도 카트 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단 하나에 대해서는 늘 똑같은 말을 합니다. "문호준은 레알이지." 라는것.
"아니 문호준 아직도 해먹는다고?" 라는 반응이 나올지언정, 문호준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모두들 인정합니다. 문호준이 E스포츠의 레전드라고 해도 부정할 사람도 없고, '전설' '천재' 이런 표현을 붙여도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문호준 자체가 카트리그의 역사고, 산증인입니다.
이 리그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 카트리그의 역사라는것도 어쩌면. 비인기 리그들이 무시 받는것처럼 정말 아무것도 아닌것마냥 취급 받을 수 있었는데, 문호준이 있었기 때문에 다르구나. 아무리 카트 자체의 인기가 떨어지고, 리그도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화제도 덜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해도, '문호준의 V10' 이라고 하면, 그것 자체가 역사로 남는것처럼, 문호준이 있었기에 그것들도 다 역사가 되고, 리그의 유산이 되어서 다시 활력과 스토리를 주는 요소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들 말입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나서, 팀전 결승. 예상대로 스피드전을 세이비어즈가 이기고, 플레임이 아이템전을 이기며 에이스 결정전까지 온 상황. 역시 박인수와 문호준이 나왔습니다.
문호준의 말로는 원래 에이스 결정전에 대해서는 좀 생각이 많았고, 유영혁 선수가 특히 연습을 많이 했다고도 하는데 이날 개인전에서 활약도 괜찮아서 문호준 선수가 나오는걸 자청했다고 합니다. 세이비어즈가 당연히 박인수가 나오는 거고, 다만 이때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개인전의 여파인지 태연하게 있으려고 해도 평소보다 박인수의 표정이 굳어 보이더군요.
정준 해설의 말과 함께 '네모 산타의 비밀공간' 트랙에서 2019 카트라이더 시즌 1의 마지막 승부가 펼쳐졌습니다.
"이제 진짜 마지막입니다. 이게 세이비어즈와 플레임이고, 이게 박인수와 문호준이죠."
경기 초중반, 두 갈래 길 부근에서 박인수는 문호준과는 다르게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우측 먼 길을 돌아갑니다. 나중에 밝힌 이유로는 워낙 개인전 병마용 트랙에서의 스탑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혹시라도 문호준이 스탑 작전을 걸 상황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어쩄거나 그 대가로 거리가 좀 멀어진 상황.
하지만 차분하게 드래프트 부스터를 모아가며 역전에 성공합니다.
박인수가 역전한 직후 찾아온 승부처 상황.
이때 박인수는 뒤에서 맹렬하게 따라오는 문호준을 보고, 지금 상황에서 계속 주행이 무난하게 펼쳐지면 재차 역전 당할거라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떄문에 승부수가 필요했던 상황.
점프 구간이 눈 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코스가 많이 겹쳐지는 두 사람.
이때 박인수는 일부러 더욱 더 노골적으로 문호준 앞쪽으로 자신을 들이밉니다.
사실 카트라이더의 물리 엔진 상 이런 접촉은 소위 '갓-겜' 을 불러서 그대로 경기를 날려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냥 앉아서 지느니 뭐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한 박인수.
공중에서 두 개의 카트가 모두 뛰어올랐는데 완벽하게 같은 코스로 날아가느라 공중에서 미세하게 접촉이 일어났고,
접촉의 영향으로 박인수의 카트가 좀 더 우측 앞쪽으로 빠르게 땅에 착지했으며,
반면 문호준은 박인수를 푸쉬 해준 꼴이 되어서 먼저 출발하는 박인수를 추격해야 하는 형국이 됩니다. 전부 박인수의 유도 아래 펼쳐진 상황.
그리고 사실상 이제 정말 마지막 경합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통로 앞에서 박인수는 역시 주행 괴물 답게 그 와중에 드래프트 부스터를 모았고, 문호준은 빌드가 꼬여 부스터를 모으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여기서 모든 승부가 끝난 상황.
결국 박인수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혀 세이비어즈의 승리로 끝난 팀전.
워낙 극적인 문호준의 승리 때문에 비교적 언급이 덜되긴 했지만, 세이비어즈의 활약은 놀라웠습니다. 카트리그의 드림팀이 결성되고 모두들 "이제 뻔하다" 라고 생각했을때,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리그의 전개는 예측 불가능한 혼돈에 빠졌습니다. 리그에 활력을 준 박인수야 말할것도 없고, 유창현 역시 기존 강자들이 부진한 와중에 놀라운 실력을 보이며 팀전도 그렇고 개인전에서도 단순히 문박 대결 이상의 재미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박인수에 대해서도 말을 안할수가 없는데...
실력에 대해서야 더 말할게 없고, 이 선수의 평소 캐릭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평소 쇼맨쉽도 많고 마이크 앞에 쥐어주면 뒤로 빼지도 않는 스타일이고 늘 웃고 다니는 선수라 생각 없거나 줏대 없이 보일 수 있는데, 그러나 선수로서는 멘탈이 아주 단단하고 확고한 선수입니다. 늘 웃고 여유가 넘치지만, 실이 없다기 보다는 확고한 마이 페이스고.
박인재 감독 왈, "박인수는 다른 선수들 보다도, 늘 자기 자신에게 승부욕을 느낀다... 아마 다른 선수가 그렇다면야 오만하다고 하겠지만, 지금 박인수의 클래스에서 자기 자신만 계속 이긴다면 리그를 완전히 부셔버릴 것." 이라고 그런 박인수의 면모를 표현하기도 했는데,
팀전 에이스 결정전에서 우승한 후, 전 그렇게 울면서 좋아하는 박인수의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이 선수가 내놓으라 하는 강자를 모두 이기며 이름을 알리던 시절에도 그런 모습은 전혀 없었거든요. 그 모습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개인전 패배 후에 팀전을 하기 전, 진행 인터뷰에서 "지금 심경 어떠냐" 라는 식의 발언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기대된다." 는 식으로 태연한 모습을 보였는데, 사실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분했구나, 정말 이기고 싶었구나... 뭐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이번 시즌만 해도 박인수는 이미 능력치로는 절정을 찍은, 그야말로 끝판왕 같은 느낌의 선수였는데 더 오기를 느끼고 다음 리그를 준비하면 그떄는 또 얼마나 흥미진진할지 그것도 재밌을것 같습니다.
"지난 시즌을 직관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넥슨 아레나의 1층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때는, 이번...이런 무대를 저희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고
사실 이번 시즌 시작할떄도 이렇게, 여기에 가득 채운 여러분들의 얼굴을 볼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무대를 이렇게 만들어준건, 모든 선수들, 그리고 여러분들의 애정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리그가 끝나고 김대겸 해설이 관련 이야기를 풀었는데,
개막할때만 해도 당연히 이번 결승 무대와 같은 건 아예 생각도 없었고,
처음 이야기가 나온것도 4주차가 지난 시점부터였다고 합니다. 세이비어즈 VS 플레임 경기에 굉장한 관심이 모여지고 화제가 된 다음주 무렵부터고. 그리고 이야기가 나온 후에도 실제로 이게 결정되기까지 내부에서 엄청난 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계속 격론이라 진짜 막판에 결정되서 결승 앞두고 마지막 방송에서야 해당 소식이 전해졌다고 하고.
그리고 실제 결승 제작비도 결승 이전까지 펼쳐지기로 했던 원래 12주간의 넥슨 아레나에서 펼쳐질 카트라이더 리그 제작비 전체를 초과하는 예산이 들었다고 하니, 제작하는 쪽에서도 굉장한 도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티켓은 불과 1분만에 전석이 매진, 인터넷 중계도 여러 플랫폼 모두 합쳐서 최대 동시 시청자가 6만 명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고,
때문에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정확한 것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아마도 여러분 생각보다도 더 자주 볼 수도 있을것 같다." 는 식으로 말을 하시더군요. 내부에서도 꽤나 이번 리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를 한것 같으니.. 카트리그 팬들에겐 희소식일것 같습니다.
문호준, 박인수... 말할것도 없고 유창현 등이나 새롭게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난 신종민, 송용준, 황인호 같은 선수들. 그리고 이번 리그에서는 주춤 했지만 본래 강자였던 이재혁, 김승태, 그리고 유영혁 등의 선수들. 다음 리그도 꽤나 스토리가 풍부할것 같습니다. 지난 리그에서는 나왔었지만 이번 리그에는 안나온 강자들도 몇명 있는데 그런 선수들 나올지도 궁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