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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소련군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마치 블랙홀처럼 제6군이 시가전에 빨려들어가는 동안 최대한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소련군이 11월 19일자로 독일군의 측면을 강타한 것입니다. 당시 측면은 루마니아 군이나 이탈리아 군 등 독일의 허약한 동맹국들이 방어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손쉽게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차군을 앞세운 소련군의 공격은 준비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매우 잘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양측에서의 공격군이 조우할 칼라치의 교량이 생각보다 너무 쉽게 점령되어 버리는 행운까지 겹쳐, 소련군은 작전을 대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제6군 및 제4기갑군의 일부는 완전 포위당했고, 이제 턴은 소련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앞선 글에서 짧게 언급했는데, 소련이 잿밥에 눈을 돌렸다고 이야기했었죠.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이쪽 전역이 마무리된 후 에필로그 식으로 따로 글을 파려고 합니다. 확실한 건 그러는 동안 적어도 이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소련군이 어떤 눈에 보이는 행동을 개시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어쩌면 독일군에게도 이 시점에서 기회는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 기회가 있었다 한들 성공 가능성이 별로 높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하여간 이 시점에서 나온 이야기가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로의 보급은 모두 공군이 책임지겠다"고 이야기한 괴링의 허장성세였습니다. 음, 실제로 완전 포위까지 몰린 데미안스크의 제16군을 공중 보급을 통해 버티게 한 전력이 있기는 했었죠. 아 근데, 문제는 그 소위 말하는 데미안스크 포켓(Demyansk Pocket)에 있던 독일군은 대략 10만 명 정도였고, 이번에 포위된 건 그 3배에 달하는 33만 명이었다는 거죠. 10만 명 보급물자도 전달하기 빡센데 그 3배에 달하는 물자를 무슨 수로 전달한단 말입니까?
괴링이 하루 600톤의 물자를 수송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양은 매일 375회의 비행이 필요한 수치였다는군요. 말도 안 되죠. 게다가 뭐 소련군이 어디 놀고만 있을 리도 없고 - 대공망을 말합니다 - 지속적인 시가전으로 인해 비행장의 상태는 당연히 개판이었으며 여기에 겨울, 즉 악천후라는 크리티컬까지 터지니 제아무리 독일 공군이라 할지라도 하루 600톤의 수송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뭐 하긴, "제아무리"라고 하기에는 이미 독일 공군의 명성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박살이 났습니다만. 생각해 보니 괴링의 말도 안 되는 호언장담(영국 본토 항공전) 때문에 히틀러가 한 번 놀아나놓고 거기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니 알쪼 아닙니까. 결국 단 하루 300톤의 물자가 수송되긴 했는데, 이마저도 필요한 물자의 40% 수준이었다는군요. 그리고 가면 갈수록 수송량이 줄어든 것도 당연지사...
이런 판이니 독일군으로서는 결국 육전으로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을 뚫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전에 우선 두 장의 지도를 잘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여겨보셔야 할 쪽은 서쪽입니다. 위 지도에서 소련군 8 KK(소련군 제8기병군단)가 진격하여 전선을 구축했는데, 다음 지도를 보시면 그 전선이 약간 주저앉아 있죠. 바로 그 지역에서 돈 강의 지류인 치르 강(Chir River)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을 끼고 방어하는 적을 상대로 공격을 벌여서 치르 강 전선을 지키지 못하도록 한 것인데, 일종의 성동격서 비슷한 느낌의 파쇄공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쪽에서 치고 올라올 구원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 도하가 따로 필요없는 만큼 공세는 동쪽에서 시작하는 게 자명했죠 - 서쪽을 미리 공격하여 양동작전의 가능성 및 페이크 공세 따위의 잔수를 미리 박살내는, 일종의 "수비를 위한 공격"이었던 셈입니다. 적의 공격이 거의 확실할 때 적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미리 병력을 보내 적의 의표를 찌르고 전투력을 박살내는 것을 파쇄공격이라 하는데, 이 시점에서 소련군이 행한 공격이 그 파쇄공격성이었던 거죠. 파쇄공격이라고 하기에는 어째 원래 목표가 훨씬 크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을 감수해 가면서 독일군이 포위망 해제 및 구출을 시도하자 작전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서...
하여간 독일군 입장에서는 서쪽에서 교란 내지는 양동작전을 벌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코텔니코보(Kotelnikovo) 한 곳에서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겨울폭풍 작전. 작전을 지휘하는 사람은 독일군의 최고 명장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그러나,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제57기갑군단의 병력은 그야말로 후방의 병력을 긁어모은, 말하자면 밥 퍼고 남은 솥의 다 타서 새까맣게 변한 눌어붙은 누룽지 같은 느낌인지라, 제대로 된 공격이 가능할 리 만무했죠. 어쩌면 상당히 큰 불운이 겹치기도 했는데, 앞서 말한 서쪽의 치르 강 방어선이 버텨 줘야 구원작전도 의미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근데 이 서쪽이 위험해진 터라 어쩔 수 없이 홀리트 분견군과 제11기갑사단이 구멍을 틀어막기 위해 발이 묶여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제11기갑사단이 가장 쌩쌩한 병력이었던 거죠. 그래서 공세에 나선 독일군의 병력은 어림잡아 5만 명에 전차 250대. 이름은 돈 집단군(Heeresgruppe Don)이었으되 실제 병력은 잘 쳐줘야 군단 하나에 불과한 병력으로 구원을 시도한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50 km 가량을 전진한 게 오히려 기적이라면 기적이었습니다.
한편 동쪽에서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소련군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 실은 작전계획에 큰 수정이 가해진 것이었지만 - 서쪽에서부터 물밀듯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소(小) 토성 작전이었죠. 앞서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한, 파쇄공격이 처음에 가졌던 큰 목표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12월 7일에 치르 강을 상대로 밀어붙인 소련군의 계획은, 원래는 허약한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쭉 남하하여 로스토프를 점령, 아예 남부 집단군 전체를 캅카스에 가둬버리는(!!!) 엄청난 스케일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폰 만슈타인의 구원 작전이 개시되고 포위망 소멸을 맡았던 제2근위군이 독일군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되자, 계획의 크기를 줄여서 이탈리아군 및 홀리트 분견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으로 줄인 겁니다. 그래서 소 토성 작전이 된 거죠. 늘 이야기하지만 안 그래도 이탈리아군은 약체였는데, 그 약체가 또다시 천왕성 작전에 준하는 공격을 얻어맞자 문자 그대로 찢어발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홀리트 분견군도 상당히 뒤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죠. 이 공격이 가해진 게 12월 16일입니다.
묘하게도, 두 작전은 마치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회전문을 보는 듯하죠. 일종의 크로스 카운터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 크로스 카운터의 승자는 당연히 준비가 잘 되어 있고 병력상에서 우위이며 싸우는 기술까지 이제 독일군의 그것에 대등해져 가는 소련이었죠.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스탈린그라드에 보급을 할 공군 기지인 타친스키(Tatsinskiy)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잠시마나 소련군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입니다. 전투 자체는 엄청나게 치열했고 게다가 공격을 맡았던 제24전차군단이 공세한계에 시달리던 터라 전차 병력의 60% 이상이 날아가는 대손실을 입었습니다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부족한 독일군의 수송기 무려 56대를 박살내고 비행장을 깨끗이 갈아엎어버리면서 더 이상의 보급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거죠. 이게 독일군의 후방인지라 결국 4일 후 독일군 후방에서 탈출하긴 했습니다만, 단 4일 동안이라고 해도 독일군의 절망적인 보급 상황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로라 할 수 있었다고 봐야죠. 폰 만슈타인이 이것 때문에 일부 병력을 가뜩이나 부족한 공세 병력에서 빼돌려야 했음(제48기갑군단)은 덤입니다.
어쨌든 비슷한 시기에 폰 만슈타인은 용케 50 km 가량을 밀어붙였지만 밀어붙인 건 독일군의 전차군단도 아닌 전차사단 규모였고, 예상치 못한 독일군의 진격 속도에 잠시 혼란에 빠진 소련군이 곧 정신을 차리고 12월 24일에 대반격을 개시해 버립니다. 독일의 대략 1개 군단 정도 되는 병력을 상대하는 것은 소련군의 3개 야전군이었고, 그 규모도 독일군의 3배인 15만 명에 달했으며, 더구나 그 중에는 정예라 할 만한 제2근위군, 제5충격군이 있었습니다. 이 제2근위군을 지휘한 것이 바로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또한 훗날 쿠르스크에서 주연 중 한 명으로 등장하게 될 파벨 로트미스트로프(Pavel Rotmistrov)의 제7전차군단(제5충격군 휘하)이 돋보였다는군요.
반격을 개시하는 소련군. 화살표의 크기에서부터 벌써 위압감이 느껴지죠. 아, 지도에서 보이는 화살표에 삼중선이 그려진 후방의 병력은 제2근위군의 일부인데, 포병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6군이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느냐는 솔직히, 무리라고 봐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탄약이고 자원이고 뭐고 남아나지가 않은 상황에서 포위망을 돌파? 당연히 장비란 장비는 다 두고 나와야 하고 몸만이라도 살아서 나가면 다행이겠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솔직히 파울루스 손을 들어주기는 힘든 것이... 그렇다고 해서 포위망에 갇힌 채로 가만히 있는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이거죠. 어쩌면 공세를 취할 만한 여력조차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다못해 포위망을 내부에서 뚫으려는 일련의 시도조차 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네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절벽으로 치닫는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을 가리켜 누가 작전이고 전략이라고 이야기합니까?
파울루스가 이 때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을 씹고 후퇴를 시도했으면 최소한 똑같이 소련군의 포위망에 갇혀서 소멸하더라도 병력의 규모가 규모다보니 뭔가 의미가 있기는 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죠. 11월 30일부터 12월 초에 이르는, 소련군이 잿밥에 눈 돌리던 바로 그 시기와 폰 만슈타인이 기적적으로 50 km를 돌파했던 두 번째 시기, 두 번의 기회를, 비록 성공 확률이 로또 맞을 확률이라고 해도 어쨌든 파울루스는 놓쳤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파울루스를 상당히 낮게 평가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뭐... 까놓고 이야기하면,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죠. 그 덕분에 전쟁이 추축국의 패전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끝날 수 있었으니까요. 파울루스에 대한 평가가 매우 엇갈리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적어도 전 스탈린그라드에서 보여준 파울루스의 위기대응능력 부재 내지는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찍소리 못하고 히틀러의 명령만 고수한 고지식함을 보았을 때 최소한 스탈린그라드라는 전장에서 파울루스라는 인물은 결코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고 평가합니다.
어쨌거나 겨울폭풍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소 토성 작전은 소련군의 전술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결과, 독일군은 오히려 겨울폭풍 작전 개시 시기의 공세선보다 50 km 가량을 뒤로 더 밀려나야 했고, 좌익의 치르 강 일대에서도 전선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제 상황은 거의 끝났습니다.
이번 연재도 슬슬 마무리를 향해서 가긴 하는군요. 그러나 아직 몇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