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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2/20 14:22:03
Name 서현12
Subject [일반] 고구려-발해 이후 한국사에 요동이 필요한 땅이었나?-이에 대한 정약용의 생각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 유배 생활 대부분을 강진에서 지내면서 단순히 시세를 한탄하지 않고 열심히 학문을 연구하고 다양한 저술에 힘썼습니다. 아무래도 강진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의 위세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남인의 거두인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였는데 이름난 학자집안이자 당대의 부유한 집안이었던 해남 윤씨 가문이었던 만큼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도서관)을 지어놓았다고 합니다, 비록 다산 개인으로서는 불행이었겠지만 그의 학문을 위해선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어쨌거나 다산의 저술은 단순히 정치, 행정 뿐만 아니라 성리학, 의학, 법학, 경제학, 역사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었습니다만 제가 전공자가 아닌고로 자세한 사항은 말하기 힘들고 단지 다산의 저작 가운데 흥미로운 떡밥이 있어서 하나 들고 옵니다, 오늘날까지 간도떡밥등으로 논의되는 요동수복론에 대한 다산의 견해입니다. 해당전문은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c001&gunchaId=av012&muncheId=01&finId=004&NodeId=&setid=682625&Pos=0&TotalCount=1&searchUrl=ok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제 12권 요동론(與猶堂全書 第一集詩文集第十二卷 '遙東論')

고구려 때는 강토를 멀리 개척하였다. 그 북부는 실위(室韋)에 접했고, 그 남부는 개모(蓋牟)(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이동이 모두 그 땅이다)에 이르렀다.

고려 이래로부터 북부남부는 모두 거란이 차지하였고, 금, 원 이후 다시는 우리 것으로 되찾지 못하였고 압록강 일대가 천연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 세종, 세조 때에 이르러 마천(摩天) 이북으로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육진을 바둑돌처럼 설치하였으며, 밖으로는 창해에 닿았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되찾지 못하였다. (다른 여러)논자는 그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女眞)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鮮卑)와 거란(契丹)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敵)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蒙古)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서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 서로 화친한다면 사신(使臣)의 접대에 드는 비용과 병정(兵丁)을 징발하여 부역시키는 일 때문에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된다면 사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므로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종과 세조때는 대명이 북경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과 심양의 사람들이 기내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차지할 수 없었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오히려 여러 오랑캐에 속했다 해도 이조(二祖)께서 이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니 어째서인가? 척박한 황무지로 이득이 없는 땅을 얻고 천하에 적을 늘리는 행동은 영명한 군주라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당 때에도 오히려 주, 진 때의 옛 일을 살펴 도읍을 관중에 정한 후에 위세를 얻어 천하를 제어하였다. 고로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바는 오로지 동서 이경(낙양과 장안)의 우열뿐이었다.

대명의 성조 문황제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나 강성한 몽고와 여진을 멀리서 제어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마침내 대명【부】(大名【府】)(북경(北京)을 의미)에 귀속시켰다. 이후 중국의 주인은 이를 바꾸지 않았고 대명부는 중국의 도읍이 되었다. 이러한즉,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으로 두 강을 경계로 삼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강역의 형태가 혼연히 천혜의 요새이니 요동을 얻는 것은 반대로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이다. 어찌 유감으로 여기겠는가?

그렇지만 진실로 나라가 부강하고 병사가 강성하여 하루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고 한걸음이라도 중원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얻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서로 요동을 얻고 동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북으로 경계를 넓혀 흑룡강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우측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


당시에도 아, 고구려의 옛 강토를 되찾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라고 탄식한 식자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다산은 이에 대해서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건 참으로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첫째로 요동은 사방이 열린 요충지로 다양한 민족이 왕래하는 곳인데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아닌 조선이 거기를 지키려면 사방에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외교에 엄청난 힘을 쏟아야 할테니 나라의 힘이 고갈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요동땅은 척박하기까지 하니 적을 늘리는 행위를 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죠.

둘째로 당시 요동은 명나라의 영향력에 들어갔고 성조 영락제가 도읍한 이래로 중국의 수도인 북경은 요동에 가까운 땅인데 중국의 주 세력이 자리잡은 땅을 쳐서 그 땅을 소유한다는건 말이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영명한 군주라면 절대하지 않을 짓이라는 의견입니다.

셋째로 이미 한반도의 지세는 북으로 압록강-두만강으로 천연의 국경이 되고 삼면이 바다인 요새지로 이것으로 충분히 나라를 지킬수가 있는데 굳이 거기다가 요동이라는 군더더기를 붙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산 역시 당대의 의론에 따라 우리의 힘이 강성하면 한번 요동을 차지해 중원을 노림직하다는 말로 이 글을 끝 마칩니다만, 당대 조선의 문제점을 세세히 짚고 강력히 비판한 다산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냥 사실상 지금 조선이 요동을 먹을수나 있겠냐, 나라가 강해져야지 그런걸 시도라도 해보지, 지금 조선 꼬라지로? 꿈 깨셔!'를 돌려 말한것이라고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산의 이 글은 비단 당대뿐만 아니라 현대의 몇몇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봅니다, 허황된 간도 떡밥을 물고 늘어져서 그 땅을 언젠가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데 이 글은 충분히 그런 이들에게 경계가 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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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나
17/02/20 14:27
수정 아이콘
저한테는 우리나라 위인 넘버3입니다.
진짜 똑똑하신 분 같아요.
최고위직으로 오를 수 있었다면 조선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마스터충달
17/02/20 18:27
수정 아이콘
1, 2등이 누군지 알 것 같...
수면왕 김수면
17/02/21 00:21
수정 아이콘
세종대왕 이후에 문종이 좀 더 장수하고, 그 아들로 정조가 났는데 3대에 걸쳐 다산이 벼슬을 지냈다면?
겨울삼각형
17/02/20 14:36
수정 아이콘
요동만 놓고보면 먹으면 좋죠.
그런데.. 조선건국후.. 요동을 차지한게,
명나라 > 만주족 > 청나라

인데.. 조선이 무슨수로 요동을 먹습니까?
빅토리아나 유로파 조선이라면 몰라도..
17/02/20 14:51
수정 아이콘
문명5 기준으로, 갓 세종은 18세기경에 전차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걸로 요동을 먹으면 됩니다.
물론 그전에 일단 석유부터 확보해야......
Liberalist
17/02/20 15:06
수정 아이콘
심지어는 요즘 유로파 조선도 명나라가 버프를 왕창 먹는 바람에 요동 뺏기 쉽지 않습니다 크크;;
변태인게어때
17/02/20 15:32
수정 아이콘
...먹는게 말이 안되는군요 크크
홍승식
17/02/20 14:46
수정 아이콘
언제나 요동을 자치한 자가 천하를 호령했죠.
땅 자체는 척박한 황무지이지만 교통의 요지인 탓에 중원, 만주, 반도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요,금,원,명 도 요동을 먹고 나서야 중원을 넘볼 수 있었죠.
그나저나 다산 때 - 19세기 초 - 에도 우리 강역의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이었나 봅니다.
1712년에 세워진 백두산경계비를 바탕으로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서현12
17/02/2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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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동감합니다.
SwordDancer
17/02/20 14:47
수정 아이콘
요동-만주가 땅이 넓지만 실상 효용성은 별로 좋지가 않았다고 하네요.
생산력이 올라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건 생각보다 최근이라고 합니다. 청나라 대에 들어서야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땅이 되었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삼국 중 고구려가 가장 영토가 넓었음에도 가호는 백제가 더 많았다고 하니 북쪽 땅 자체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배를바란다
17/02/20 15:13
수정 아이콘
조선 시대가 되면 이미 고구려 떄랑 몇백년 차인데, 요동 정벌은 말도 안되죠. 요동에 사는 민족과 조선인은 모든게 달라서 통치하는데 힘도 크게 들텐데 그 대신 얻는 것도 보잘 것 없구요
보통블빠
17/02/20 15:14
수정 아이콘
사실 대중매체에서 위대한 고구려니 환국이니 하면서 요동타령이 나오는것도 20~21세기에 나온 자원덕분에 더 각광받은것 같습니다.
17/02/20 15:20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론 고구려가 통일했어도 결국은 지금과 비슷한 영토로 줄어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통일 신라가 통일 후 한동안 전성기를 누렸지만 머지않아 내부모순으로 몰락한 것처럼, 통일 고구려도 분명 강성했겠지만 결국 200년 쯤 지나면 내부모순으로 약해졌을 텐데, 이때 거란과 몽고 등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으면 북부지방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만주와 요동을 지배한 발해가 결국 거란에 멸망한 것처럼요. 그게 아니어도 당나라처럼 바로 옆에 강국이 있는 걸 경계하는 중국계 통일국가와 계속 전쟁을 치러야했을 테고, 근본적인 국력 차이 때문에 언젠가는 결국 삐끗해서 패배하여 실제 고구려처럼 해체되었을 것 같아요. 덤으로 백두산 폭발이라는 보스도 있고요.
요르문간드
17/02/20 15:51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는 백제가 통일하는것이 가장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고구려가 통일하는것보다는 신라가 통일하는게 나았다고 봅니다.

영토는 나라가 망하면 알아서 쭈그러드는것이지만, 문화는 쉽게 바뀌는게 아니고, 약탈경제로 시작한 고구려보다야 신라가 낫겠죠
17/02/20 15:22
수정 아이콘
요동이 우리 영토였던 기간을 따지면 광개토대왕때부터 고구려 멸망까지 250년정도에 불과하죠
고조선이 요동을 지배했다는 역사적 근거는 거의 없고 발해도 점령한 정도 이니까요
우리역사가 대충 3000년에서 2500여년 인데 요동을 차지했던 역사는 10분의1에 불과할뿐이죠
반면 중국은 전국시대, 진, 한, 당,(원) ,명, (청), 지금 중국까지 중국역사에서 요동을 차지했던 기간이 차지 못한기간보다 훨씬 길죠
서현12
17/02/20 15:28
수정 아이콘
사실 역사적 연원을 따지면 요녕땅은 중국이 그 근원을 주장할수 있는게 맞긴하죠. 이렇게 말하면 밖에선 두들겨 맞겠습니다만...
홍승식
17/02/20 15:31
수정 아이콘
환국으로부터 8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라능!!
이슈타르
17/02/20 15:41
수정 아이콘
요동장악은 뭐 조선조에선 어려웠고 고려말 의 원말 명초시기에 기회를 놓친것이 그나마 유일한 기회 같습니다..아니면 누르하치가 세력 규합전에 이성량 총관의 후반기 시절이 조금 공백이고해서 다음 2번재 기회 인데 조선조가 대거 국가 체제 혁신해서 군사력을 키우고 특히 화약무기에 배가의 노력을 기울엿다면 만주족 장기인 8기를 이거로 무너트리고 요동과 여진족 거주지역을 정복하고 장악은 가능 하지않을까 한 생각이 드는군요

북방으로 영토를 안늘리고 여진족 토벌을 방임한게 나중 청나라가 일어선 계기이고..한편 조선의 부족한 식량문제 해법 입니다

조선도 팽창할 공간은 많앗거든요.. 그냥 유교쟁이들이 총칼 잡는거를 워낙 기피하고 전쟁을 방임 포기 해서 그런거지요
홍승식
17/02/20 15:49
수정 아이콘
원말 명초시기에 요동을 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됐다고 하죠.
그 다음에 영락제가 북경을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도도 옮겼는데 바로 턱밑에 조선땅을 내비두겠습니까?
그리고 부족한 식량을 요동을 통해 해결한다는 건 더 어불성설입니다.
요동 근처에 퍼져 살던 여진족이 매번 조선에게 구걸하는게 식량이 없어서인데 요동을 얻어 늘어난 인구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이슈타르
17/02/20 15:58
수정 아이콘
명나라가 영락제 이후 무능한 군주로인해 계속 가라않고 했죠..명군이 전성기 때 처들어오면 후퇴하고 철수하면 나아가고 이런 전법으로 다시 요동을 찾아오는 전략을 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대방향에서 명나라를 견제하도록 북원 및 오이라트 등 초원민족 세력하고 연대하는 노력이 중요하죠
한민족 장점이 산성축조후 여기서 기반으로 수성전 하는데 아주 강하고 ..요동의 동쪽지역은 하나 같이 험난한 지형 뿐입니다..공성무기들 가져오고 해도 함락 못시킴니다
명나라는 북경주변 비워놓고 장기 원정을 할수가 없는 구조이죠
고구려가 당에 멸망당하는 계기는 서측 방향에서 당을 견제 해온 돌궐=터키가 망해라고들 합니다
이슈타르
17/02/20 16:29
수정 아이콘
식량은 우리 조선인 고려인들이 현지로 대거 이주해서 개간을 시켜야죠,,농사기술로 치면 조선 고려가 우수햇죠..그리고 농사나 개간을 하자면 인구가 어느 정도 되야 합니다
요동 자체가 그렇게 넓지가 않고 조선 중기에 만약 300만명을 이주시키고하면 현지 농경지 개간시업 둔전병식 수비 병력 해결..현지 정착 기반 조성 다 성공하고 했을게죠
요하는 상당히 큰강으로 조선하고 명이 2나라 경계로 삼기에 적합하고 이를 넘어서 군사작전을 벌이기에 불리합니다..일단 그렇게 요동에 발을 들어놓으면 이후 영토가 분할되서 2나라간 경계 유지는 안정화 되고 했을게죠
홍승식
17/02/20 16:47
수정 아이콘
세종조때 육진 개척하고나서 함경도로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요동으로 300만명요?
스덕선생
17/02/20 18:16
수정 아이콘
절대 불가능합니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51670741
에 따르면 조선왕조가 파악한 인구가 1861년에 약 700만명인데 납세자 절반을 요동으로 옮기자는 이야깁니다.
거기에 조선은 기본적으로 작은 국가를 지향했기에, 그들을 1년이라도 먹여 살릴 능력이 못 됩니다.

백번 양보해서 1년만에 그들이 지원이 필요 없을만큼 성장할 수 있다 쳐도,
최소한 그들을 보호하거나 도망치는것을 막는 부대를 파견해야 하는데 이것도 최소로 줄이고 줄여도 5만명 규모는 필요할겁니다.
이슈타르
17/02/20 19:09
수정 아이콘
17세기 경 조선의 인구가 1000만명이니까 그 30% 정도 되겠군요..여말 선초라면 더 즐어들어 최대 이주인구가 150만명만 가능 했을검니다..그만한 인주 이동을 강제로 시키고 하자면 강력한 행정력 즉 왕권이 뒷받침 되야 하는데 군약신강의 조선은 이부분에서 난감하죠..이 모든것이 그래서 철저한 국가 개혁 아니면 안되고 거의 같은시기 유럽 절대군주 국가와 같은 왕의 힘이 강해야 가능한 사업이죠 ..판타지에 근접하지만 하여간 HOW에 대해 시나리오를 적다보니 그렇게 나오는군요
최종병기캐리어
17/02/20 18:17
수정 아이콘
함경도만해도 '기후적인 조건'으로 항상 기근에 시달리는데, 이모작도 안되고 인구부양력이 우수한 쌀도 못짓는 요동지방을 개간해봤자 매년 기근으로 퍽퍽 죽어나갈겁니다. 여진, 거란족이 농사를 지을지 몰라서 안지은게 아닙니다. 그 당시의 농업 기술력으로는 지을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안짓는겁니다. 조선, 명의 기술로도 커버할 수 없는 지역이었던겁니다.

게다가 조선 중기에 300만명이라뇨....조선 총 인구가 5백만에서 7백만 왔다갔다 했습니다.인구 절반을 요동에 이주시키면 조선이 망합니다...
cadenza79
17/02/20 18:23
수정 아이콘
말씀대로 이주란 게 쉬운 게 아니죠.
사실 지금도 300만 명 옮기려면 공짜로 땅 준다고 해도 폭동 날 겁니다.
한번 가면 고향으로 돌아올 방법이 거의 없는 그때라면 이건 그냥 귀양이니...
이슈타르
17/02/20 19:15
수정 아이콘
아 그러고보니 평안도하고 기후가 비슷한 요동반도 남부 같으면 논농사는 가능 하리라 봄니다..그러면 농지 대비 인구부양력은 3배도 가능하고 ...이건 작물 기술에 달리는건데 조선이라면 해내었을게죠.. 하튼간에 요동지역을 장악시에 조선 인구의 3할에 해당 농업력이 생겨나 인구가 그정도 더 늘것이고 이에 따라 국력이나 군사력도 비례해서 늘게 되는데 더 중요한점으로 건주여진의 견제가 가능하여 누르하치든 누구든 세력 결집을 못해 청의 탄생은 불가능 했을지도 모르고 명나라는 내부 부패 및 쇠퇴함에도 안망하고 생명 연장..이러면 근세 동아시아 역사가 많이 달라졌겟지요
17/02/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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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고려의 농사기술은 우수하지 않았습니다. 토지생산성이 노동생산성을 뛰어넘은게 17~18세기의 일입니다.
집약농법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였고 관개수로의 보급이 열악했습니다 고려후기에 중국으로 부터 수입해온 이양법은 18세기나 되서나 제대로 보급되고 상용화될 수 있었을 수준입니다.

조선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싶으면 농업용 수자원 확보를 위한 시설확충에 힘쓰는 게 더 상식적이고 실질적인 해결방법입니다. 다행히 조상님들은 그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했고요.
이슈타르
17/02/20 20:29
수정 아이콘
한반도가 비옥한 토질이 아니죠... 중국은 화북은 황토 및 중부는 장강 덕분에 상대적으로 비옥합니다,,이앙법은 선초부터 조정에서 의도적으로 막고 햇다더군요..이유도 석연치가 않죠 가뭄이 무서웠다나요??...
영토가 평면상 늘면 그외 장점이 많습니다 , 다양한 작물의 획득, 목재 및 지하 자원 증가..국방상 유리 한 점도 큼니다...
17/02/20 20:36
수정 아이콘
이양법을 금지한건 당연합니다. 제대로 된 관개시설과 수자원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양법을 쓰면 농사를 망치기 아주 쉽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것도 보급하지 못할만큼 조선시대의 농업관련 인프라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뜻이고요. 지질학적으로 토질의 문제가 얼마나 결정적인 요소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술적 측면에서 조선은 절대로 농업 선진국이 아니었습니다. 우수한 농업기술로 요동반도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조선백성들의 기아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셔서 그게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요르문간드
17/02/20 15:56
수정 아이콘
애초에 만주는 그렇게 가치있는 땅이 아니죠. 최근에야 석유등으로 그 가치가 많이 올라간것이지

조선이 팽창을 하고자 했다면 해양으로 세력으로 확대하는것이 맞겠죠.
조선이 망한건 북부로 팽창을 안해서 그런게 아니라, 서양과의 교류를 등한시하고 세상의 흐름을 못읽은 탓이니까요.
조선처럼 작고 약한 나라라면 네덜란드를 롤모델로 삼아서 국가를 이끌어가야하는데, 현실은 뭐;;;;
이슈타르
17/02/20 16:23
수정 아이콘
고려 조선이 팽창 가능한 방향이 만주- 요동하고 지금 연해주 방향..그리고 포르투칼 같이 해양으 로 진출 해외에 식민지 건설등인데 사실 고려가 요동을 어떻에게 좀 해보려도 하다 2차례다 실패,,조선은 정도전 이후로 전혀 시도를 안햇고 (효종 시절 북벌은 청나라만 죽인다!!....이라),,고려 인종때 동북방 개척도 좀더 치밀히 준비하고 했다면 이후에 연해주 까지도 고려조 군대가 공략하고 햇을검니다
윤관 장군 동북방 정벌 실패가 너무 아깝죠
오리엔탈파닭
17/02/20 17:24
수정 아이콘
현대인인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으니 해양 무역, 그것도 대륙간 장거리 해양 무역의 의미를 논할 수 있겠지만
자급자족 농경 경제를 잘 굴리고 있던 당대 조선인이야 고도의 하이리스크 방식인 해양무역의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었겠죠.
더구나 당시 서유럽이야 리스크가 높을지라도 중국/인도 무역의 리턴 역시 높으니 시도해볼만 했지만
당시 조선에서 원하는 정도의 교역 수요는 중국이 채워주고도 남으며,
타 대륙 국가들이 그보다 가치있는 교역품을 가진 것도 없으니 무엇하러 해양무역을 시도하겠습니까.
고기반찬
17/02/20 15:58
수정 아이콘
이미 여말에 요양까지 점령했다가 역량이 안되서 그냥 토해냈습니다. 일시 진출이라면 모를까 점유는 역량 초과죠.
능숙한문제해결사
17/02/21 01:19
수정 아이콘
사람 이주하는게 커맨드센터 띠워보내고 일꾼보내는것같은게 아닌데요

그리고 쳐들어오면 후퇴하고 철수하면 나아가고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구요

중국애들이 빡쳐서 쳐들어올때 누가 요동까지만 들어온다고 약속해줍니까? 압록강은 안넘을거라고 누가 약속해주나요?

이영호가 위화도에 터렛이랑 시즈탱크 박아준다고 하던가요?
이슈타르
17/02/20 15:49
수정 아이콘
요동의 지세로 보아선 일단 장악후엔 비교적 수비가 쉬운편입니다..북서방으로는(주로 명군) 요하를 이용하여 막으면되고..동북방으로는 (여진족들) 산지에 산성 구축해서 적군을 막으면 되요..그리고 2차 저지라인으로 압록강 이용한 방어작전이 가능합니다
고구려는 이렇게 국방 전략으로 국토를 보존하고 침공한 적에 대해 전쟁 치루고 한게죠
그런데 요동이란 장소는 대부분 산지라서 이용할 농지가 작습니다..잠재 농지는 대지가 평탄한 요서가 넓은 데 만약 요서를 고려나 조선이 향유 햇다면 막강 국력 향상이 가능하고 했을검니다.
즉 요동 유지 노력에 비해 소출이 작아 경제성 따지고하면 불리하고 한건 맞습니다

20세기 초엽의 시기라도 마찬가지인데 만주 전체를 우리가 소유 했다면 어느 누구 안부러웠을게죠,,만주에서 대경유전이라고 과거 엄청난 매장량의 석유를 발견해서 중공이 필요로한 석유 대부분을 야기서 충당하고 하기도 했죠
1950년대 만주를 장악하고 했다면 한국이 사우디 ,쿠웨이트 같은 석유 부국이 될 운명 였죠

그리고 만주는 세계적 농경지 가진 지역으로 농업 생산 잠재력이 엄청난 지역입니다
17/02/20 15:56
수정 아이콘
고구려때는 북중국이 분열되고 후연에서 북위로 패권이 넘어가는 시절이였죠
실제로 후연이 북위를 칠때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하는등
북위도 후연도 뚜렷이 어느쪽이 패권을 가지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당시 요동지역에 권력공백기였습니다.
그렇게 약해질때로 약해진 후연하고도 8년을 전쟁을 해서 요동을 차지한겁니다.
반면 명은 중국을 통일하고 심지어 요동을 자기땅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님이 말한 그 시기에게도요 요동은 명나라땅이였어요 아예 차지하기도 거의 불가능한 시기였죠
이슈타르
17/02/20 16:11
수정 아이콘
요동하면 보통 요하의 강서측 하고 지금 심양 북단의 장춘 을 기점으로 아래에 의하 그어진 공간인데..대략의 면적이 지금 남한 땅하고 비슷해요 그런데 산지가 대부분으로서 농사짓기에 불리합니다
그리고 논농사가 아닌 밭농사만 지어야 지요..농업 생산량은 최대로 개간한다해도 당시 조선의 1/4 정도는 나오고 할게죠..주산업이 원래 근세기 까지 만주가 원래 짐승 사냥해서 가죽 벗겨 파는건데 현지 주민은 자체로 식량 해결해야 하니 요동 장악에 성공시에 조선의 인구를 25% 는 넉넉히 늘리고 햇을검니다 ..더 많은 농지를 바랜다면 요서로 나가야 하는데 이건 불가능이죠
요서가 상고시대 이후로 많은 동북 동이계 민족들 , 한족들이 각축을 벌이던 교차로 같은 핵심요지 엿습니다
유럽의 선진 문명이 수입되어 만주 개척에 투입 된다면 만주 전체는 식량 의 보고가 되었죠..그전엔 유목도,농사도 안되던 불모의 대지 였다죠
라이징썬더
17/02/20 16:22
수정 아이콘
요동은 진짜 요충지 중의 요충지죠~
비옥한 산둥반도와도 연결되고
북경지역 만주 몽골초원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으니
이 지역을 차지한 나라가 사실상 동북아의 패자였다고 봅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 지역만 갖고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죠 머..
지니팅커벨여행
17/02/20 16:52
수정 아이콘
정약용의 판단은 당시로서는 정확하고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죠.
마찬가지로 현재의 입장에서 윗 댓글들처럼, 지나고 나니 있어 봤자 지키는 데에 쓸데없는 국력이 들어가고 힘드니까 필요없는 땅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점유하고 있던 당시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이 또한 근거가 빈약한 게 아닌가 싶어요.
어차피 수비가 어려워 빼앗길 땅 아니었냐 라는 논리는 결과론이죠.
당시 고구려, 발해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고구려와 발해 모두 실효적 지배를 했었고 그때의 국력에 맞게 몇백년 동안 잘 유지했는데요.
공민왕의 북진과 4군 6진 개척 모두 결과적으로 우리가 잘 지켜 왔으니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만약 그때 개마고원 이북을 점령하지 못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청진 이남의 경계를 가지고 현재를 살고 있다면, 어차피 개마고원은 전부 산지여서 농지가 부족한데다 일년중 절반은 겨울인데 필요없는 땅이다 라고 했겠죠.
심지어 신라가 통일한 게 고구려가 통일한 것보다 잘한 일이다는 댓글까지 있는데...
멸망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겨우겨우 당나라에 가서 원정군을 빌려 올 수준 밖에 되지 않는 나라가 본인들도 예상치 않았던 통일을 하는 게, 그보다 막강한 정치 군사적 실력을 갖고 있는 나라가 통일하는 것보다 과연 잘한 일인지 의문입니다.
현재 중국의 영토는 청나라 때에 완성된 건데, 고구려가 통일해서 그에 맞게 후대를 이어왔다면, 금이나 청을 건국할 시점의 여진족이 과연 그렇게 강성했을지는 모르는 일이고 중국 땅덩이가 저렇게 되었을 지는 모르는 일이죠.
결과적으로는 신라가 난국을 잘 수습하고, 북쪽에 다시 발해라는 방패가 등장해서 한반도를 고려에게 무사히 넘겨준 것에 통일 의의가 충분히 있긴 하지만요.
환빠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해서 우린 이것밖에 안돼 하는 듯한 인식을 굳이 가질 필요는 없겠지요.
서현12
17/02/20 16:54
수정 아이콘
이렇게 생각해볼만도 하죠, 말씀 잘 들었습니다.
17/02/20 17:02
수정 아이콘
논란이 있지만 발해가 요동을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증거는 없어요. 사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도요
있다하더라도 선왕때 이후 몇십년 정도 예요. 발해 초기에는 당이 후기에는 거란이 지배했죠.
대체적으로 공민왕때 처럼 점령하고 빠진거라고 보고있습니다
서현12
17/02/20 17:04
수정 아이콘
자세히 보니 발해 얘기도 있었군요, 그러고보면 요즘 국사 교과서나 학계에서 내세우는 지도를 보면 발해가 요동을 점유한거 처럼 그리더군요, 예전에는 요동은 빼고 그렸었는데 말이죠.
지니팅커벨여행
17/02/20 17:21
수정 아이콘
요동=요동반도는 아니잖아요.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 시점이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요하의 동쪽이 요동반도에 한정되지는 않죠.
17/02/20 17:38
수정 아이콘
보통 요동하면 지금의 랴오닝성을 기준으로 요하 동쪽을 의미하죠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고요
요하 동쪽의 만주 전체를 요동이라고 칭하지는 않습니다.
정확히 예기 하자면 전국시대이후 한나라까지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요하 동쪽지방을 요동군이라하여
그 지역이 요동이 된것이죠
지니팅커벨여행
17/02/20 17:48
수정 아이콘
만주 전체를 요동으로 칭한 게 아니라, 요동이 요동반도+요하 동쪽 영역이라는 얘기죠.
요동반도까지의 진출이 선왕 대에 이루어 졌을 수는 있지만 요하를 접하고 있는, 쉽게 말하면 예전 국사책에 적혀 있는 요동반도를 제외한 발해의 영토 지도의 영역은 발해가 지배했다고 봐야 하지 않나요?
17/02/20 17:57
수정 아이콘
대체적으로 요동의 중심은 지금의 선양이죠 님이 말하시는 요동이 아마 선양 일겁니다.
님이 말하는 좁은의미의 요동반도는 선양이 없으면 아무 의미없는 땅이 되버립니다.
왜냐하면 고립되어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거기에 평야나 큰강이 있는것도 아니고요
요동을 말할때는 보통 선양주변을 말하는것이예요. 요동반도는 그냥 부속품이예요
제가 말하는건 그 선양을 지배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거예요
17/02/20 20:58
수정 아이콘
발해 요동지배 논란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예전에는 발해의 요동지배를 못했을 것이다 라는게 한국사나 중국사의 정설이였지요
왜냐하면 동시대의 당나라가 요동을 굳건이 차지하고 있었기때문이죠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의 시대 들어서
중국전역에 들어서 유력 절도사들이 활동했지만 그 당시 요동에는 후한말 공손씨같은 유력세력이 없었습니다.
야율아보기에 의해 거란이 발호 하기까지 100여년간 요동은 무주공산이였지요
그런데 그 시기 발해는 30년간 6명왕이 바뀌는 혼란을 종식시키고 선왕때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요동같이 중요한땅은 강력한 어떤세력이 분명차지하고 있었을것이고 그당시 그 지역에 강력한 세력은 발해 밖에 없었으니까요
이게 발해 요동지배설에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요즘 들어와서 몇몇 교과서나 학계에서도 발해요동지배설이 종종 나오죠
그러나 사료나 유물유적에 의한 주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추측에 의한 주장일뿐입니다.
홍승식
17/02/20 17:11
수정 아이콘
고구려, 발해는 고대국가로서는 몰라도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겁니다.
가장 중요한 농업생산력이 국가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고구려, 발해도 반농반목의 생활을 했고, 요,금,청 모두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지면 생산력이 높은 중원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통일을 해서 압록강이 우리 민족의 중심이 되었다면 압록강 중심의 민족과 한강 중심의 민족이 전혀 다른 민족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중심의 민족은 다른 유목민족처럼 해체 흡수 되었을 가능성이 높죠.

전 사실 고구려, 발해와 현재의 한민족은 서로 연관성 자체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지배층이 백제의 지배층이 되었을 뿐이고, 토착 신라인들이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한 후 고구려 유민을 일부 받아들은 것 뿐이죠.
발해는 더더욱 연관이 없구요.
한민족은 한강 이남에서 발원해서 북쪽으로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압록강을 경계로 황하 유역의 중원을 중심으로 확장한 중국문명과 만난 거죠.
그래서 전 현재의 만주지방은 우리와는 사실 관계가 없지 않나 싶어요.
서현12
17/02/20 17:15
수정 아이콘
그렇게만 보기 어려운게 고려의 건국세력인 해서지방 호족들은 거의 다 고구려 유민 출신들입니다, 당장 왕건만해도 백두산 인근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고구려계 유민의 후예였고요. 너무 만주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고구려와 현대 한국과의 관련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7/02/20 17:31
수정 아이콘
고구려가 통일을 하면 압록강이 중심이 아니라 대동강이 중심이 되었겠죠.
경상도 일대의 평야와 만주+대동강 유역의 평야 크기를 비교해 보면 고구려가 아무리 반농반목을 했다지만 농업 생산량에서 신라에 뒤졌을까요?
게다가 고구려, 발해와 현재의 한민족 연관성마저 부인하시면...
사료적으로 봐도, 북방 세력의 이주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백제인데 이것마저 부정하시면 곤란합니다.
지배층이 달랑 몇백명 내려와서 한강 일대를 장악하고 나라를 세워 몇백년을 지속한다는 논리는 쉽게 수긍할 수 없네요.
조선 중기까지의 혼인 풍속만 봐도 고구려 시대의 데릴사위제와 흡사한데, 상류층만 그런 건 아니죠.
한국인의 유전자 분석 결과만 봐도 북방계와 남방계가 섞여있고,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민족이 만주족인데 남쪽에서 기원해 소수의 북방계를 받아들였다는 건 말이 안 되죠.
홍승식
17/02/20 19:21
수정 아이콘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성계의 선조인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할 때, 그리고 삼척에서 원산으로 이주할 때 각각 170여호가 따라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 저술한 책이니 인원을 늘리면 늘렸지 줄이진 않았을 거라고 본다면 13세기에 이주를 했을 때도 170호 - 1호당 10명이라고 쳐도 1700명 - 면 아주 많은 인원이 따라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천년 이전에 이주를 했을 때 그보다 많은 인원이 이주했다고 보기는 어렵죠.
소수의 지배층이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가 오래가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제 사람들은 삼한 - 마한, 진한, 변한 - 의 사람들이라고 보는게 맞겠죠.
그래서 신라도 삼한을 통일했다고 하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지는 않았구요.
전 삼한과 고구려계는 민족적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통일신라 이전엔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고, 통일신라 이후 대당 저항이나 고려, 조선조를 통해서 민족 의식이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고구려가 망한 후 일부는 신라로 귀순을 하고 일부는 발해로 갔으니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겠죠.
발해는 또 다른 얘기겠지만요.
틀림과 다름
17/02/20 20:38
수정 아이콘
다산의 애기에 대해 공감을 하는데 그걸 반대로 생각해봤습니다
다산이 저런 애기할정도면 저 요동을 차지하자라고 주장하는 선비들이 꽤 되었나 봅니다
17/02/20 21:04
수정 아이콘
요동보다는 만주 지역 전체가 아쉽죠. 힘이 좀 강해서 그 지역에 영향력이 있었으면 만주 애들이 쳐들어오는 일이 없었을텐데...

근데 문화가 달라서 내부에서 반란이 많았을거같긴함. 외려 너무 강해서 중국쳐들어갔으면 청나라 꼴났을거같기도하고
17/02/20 21:59
수정 아이콘
통일신라이후 한국의 역사는 계속 영토를 늘려온 역사입니다.

통일신라보다 고려가 더크고 고려보다 조선이 더 크죠. 영토를 늘릴 생각을 안한게 아니라 그냥 우리의 한계가 두만강 압록강 까지였던거죠... 뭐
라이징썬더
17/02/20 23:35
수정 아이콘
요즘은 신라-발해 남북국시대라고 하죠. 발해 멸망후 신라에 발해유민 유입된 후로보면 그런 설명이 맞을테구요.
불굴의토스
17/02/20 23:50
수정 아이콘
흠...조금 다르긴 하지만 서주가 교통 요충지지만 수비 어려우니 형주를 먹어야 된다는 오나라 명장 누구의 의견이 생각나네요...주유인가 노숙인가
서현12
17/02/21 00:05
수정 아이콘
여몽이지요, 다만 여몽의 논의는 정약용의 논의와 다르다고 봅니다.

정약용은 우선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서 평화로운 조선 상황에서 요동을 취하는건 어렵고 동맹관계도 없이 사통팔달의 땅을 지키긴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거기에 막상 그 땅을 먹어도 중원으로 진출하기 어렵고 먹어봐야 황무지인땅에 이득은 없다는 거였죠.

반면 오나라는 합비를 동파하면 서주말고도 예주, 나아가 허창까지 진출할수가 있고 이는 위나라에 상당한 위협이 됩니다. 또 예주-서주땅은 황폐한 땅이 아니며 오히려 많은 군현이 있을정도로 발전된 땅으로 일단 여기를 돌파하면 어디든 진출하기 편합니다, 또 형식상으로나마 촉이라는 동맹도 자리잡아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정약용 선생조차 정말 중원을 도모하고자하면 요동은 필쟁의 땅이라는 언급을 하는데 당시 오나라의 북정도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안 그랬으면 굳이 손책부터 손권까지 서주쪽을 뚫으려고 진등이랑 싸우고 손권이 적벽 이후 스스로 서주목을 칭하고, 나중 촉과의 영토 분할 협상에서 서주를 오 땅으로 둔다라고 하지 않았을테지요. 제갈각을 비롯한 오의 군권 1인자들의 끊임없는 수춘방면 북정도 그러하구요. 거기에 여몽의 계책을 완성하려면 촉의 영안과 양번까지 흡수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데 그 당시에 과연 가능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근본적으로 중원과 떨어져 있는 조선땅과 장강과 회수를 기점으로 중원과 맞닿는 오나라와의 입지 차이도 있고요, 중국 입장에서 조선은 굳이 먹을 수고를 들일 필요까진 없지만 오나라는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중원 입장에서 접수해야 하는 땅인점도 그러합니다.
무무무무무무
17/02/21 08:02
수정 아이콘
전 여몽의 말도 당시 현실을 정확히 파악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수운 접근성이 용이한데다 기습만 하면 피해없이 먹을 수 있던 형주에 비해 호족연합 수준인 수군 중심의 오나라 군으로 적지를 몇백km씩 돌파해서 서주까지 나아갔다간 개박살나기 딱 좋죠. 아직 조조가 하북을 차지하지 못하고 앞뒤로 적을 맞아야했던 시절에조차 손책과 손권이 조조 본군도 아니고 진등을 뚫지 못하고 물러섰는데(배송지니 행장이니 누가 이긴거니 논쟁이 있는 부분은 제외하고 최소한의 사실만 해도 그렇죠) 하물며 중원을 안정시키고 하북을 평정하고 마초를 토벌해서 옹양까지 점령한 위를 상대로 장거리 원정, 그것도 오에 지형상 이점 따위는 단 하나도 없는 평원에서 야전으로 위나라 주력과 맞선다? 그 유비조차도 한중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지형 우위를 다 끌어다 썼는데? 물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전에 오의 군대는 합비와 수춘조차 뚫지 못했지만요.
서현12
17/02/21 10:25
수정 아이콘
여몽의 계획 전제 조건은 관우의 형주를 먹는것만이 아니라 익주의 영안, 양번까지 모조리 섭렵해서 방어선을 완성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관우의 형주도 정면으로 치고 못 들어가서 온갖 기만책과 기습을 걸어서 간신히 접수했는데 여기에 당시 위나라 참모진들은 손권을 믿을수가 없으니 관우를 추격하지 말고 대기 타자고 할 정도였는데 위의 주력이 모인 양번과 촉의 입구인 영안까지 동시에 접수한다? 여몽이 얼마나 뛰어난 사령관인지는 알지만 이번 합비, 수춘을 뚫는거 이상으로 어려운 난이도 아닙니까? 결국 근본적으로 저걸 먹을수가 없으니 형주방어선 완빈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소리거든요, 손권이 뭔 짓을 할지 모르니 오가 망할때 어디서 망했습니까? 바로 저기서 밀고 들어오는 수군병력으로 망했습니다. 괜히 후세 사가들이 여몽의 계획에 태클걸고 이게 말이 되는 계획이냐, 오나라 말아먹을 소리다. 기록이 잘못된거 아니냐고까지 말한게 아닙니다.

관우가 양번을 칠때 조조는 장료까지 빼가면서 전력을 기울였는데 이때 오-촉 양쪽에서 치고 들어갔으면 위나라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었겠죠, 지형상의 이점이 없다면 최소한 병력분산의 이점이라도 노렸어야 하는것이 아닌지? 그리고 합비, 수춘을 넘어 서주, 예주까지 칠 계획이 없었으면 손책부터, 손권까지 계속 거기를 두드릴 필요가 없고 이미 조조가 하북을 장악한 상태에서 손권이 스스로 서주목을 칭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유 노숙때는 손권 본인이 그쪽만 주구장창 노리다가 여몽대에 와서 저말을 들었는데 이건 저 포도는 먹어봤자 시어터졌을거다라고 하는거나 다름이 없죠. 그리고 이후 촉-오 동맹 재정비 당시 오나라가 서주와 예주를 가지기로 합의를 했고 그 이후에도 제갈각 20만 대군 출병등 끊임없이 이쪽으로 출병합니다. 제갈각의 20만 북벌 당시에도 촉과 연계해서 위나라의 병력 분산을 노렸고 당시 위나라 대신들은 사마사나 몇몇을 제외하면 도저히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갈피를 못잡았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사실상 오나라는 서주, 예주방면을 먹는다는걸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무무무무무무
17/02/21 12:53
수정 아이콘
앞뒤가 바뀐 게 오나라가 먼저 번국을 칭하면서 복종하니까 조조가 장료를 빼갔던 겁니다. 오나라가 합비를 노리는 움직임을 보였으면 조조가 당연히 장료를 빼가지 않았을거고 합비를 넘지 못하면 위험이고 뭐고 없죠. 거기다 더군다나 관우는 장료가 도착하기도 전에 서황에게 격퇴당했으니 설령 뒤통수가 목적이었다해도 오가 출병해서 합비를 공략하는 동안려 조조 본군과 장료군이 동시에 합비로 진격해갔겠죠. 결국 형주는 못먹고 합비에선 막히는 최악의 결과가 도출될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삼국시대 내내 위나라의 변경조차 제대로 넘어보지 못한 오가 합비를 넘어 서주와 예주로 진격했다면 하는 얘기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손책-손권이 진등에게 막히고 조조가 하북을 장악하면서 이미 그 시점에 오는 사실상의 기회를 잃은거죠. 내가 서주목입네 위나라가 밀리면 우리가 서주와 예주를 가지겠네 말이야 누가 못하겠습니까?
서현12
17/02/21 13:13
수정 아이콘
관우는 서황과 만총의 협공에 격퇴당한 이후에도 면수를 장악하고 양양을 완전히 포위해 연락을 끊었습니다. 정작 관우의 퇴각은 손권이 뒤를 치고 나서야 발생했고요. 이 상황에서 위나라는 관우를 상대하기 위해 주력을 번성에 묶어 둘 수밖에 없었고 애시당초 위나라는 손권을 믿을수가 없어서 관우의 퇴각을 방치했을정도로 손권을 불신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장료를 합비에서 빼낸거 자체가 일종의 도박성이라는거죠. 번국을 칭했다고 한들, 얼마전까지 유수구등에서 싸운 손권을 믿을수 있는것도 아니고 손권이 말은 저렇게하고 합비로 간다고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거 인지하고 뺀 거라는거죠. 또 제갈각의 북벌에서도 드러나지만 위나라에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촉과 오가 한번에 양쪽에서 진군하여 병력을 분산하게 되는 사태입니다, 심지어 제갈각의 북벌에선 촉의 비의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서 촉측 병력의 규모가 비교적 약했는데도 위나라 중앙이 우왕좌왕 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서주와 예주를 안노렸다면 굳이 그 수많은 세월을 합비와 수춘을 노린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애시당초 주유나 노숙이나 손권에게 진언할때는 당연히 천하를 노려야 한다고 진언했고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게 유비와의 동맹과 북쪽으로의 진군입니다. 내가 서주목이라고 칭하는건 실질적으로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겠다고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일이고요. 이런데도 오나라의 북쪽 진군이 아무런 의미가 없겠습니까?
Allemagne
17/02/21 11:40
수정 아이콘
요동을 갖고있는한 중국과의 평화,우호는 없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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