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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2/01/16 00:36:05
Name 항즐이
Subject 꽁트> 할루시네이션
할루시네이션

세상에서 가장 버림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때로 학창시절에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의 색이 바뀔 즈음에 드는 생각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이 세상에 내 존재가 필요없다는 허무함이다.

그러한 생각을 오싹함 하나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것이 그 즈음의 감성이라면,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마저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요즈음의 메마른 냉정이다.

사람들은 나를 할루시네이션이라고 부른다. 얼마전 방송으로 나갔던 팀배틀 경기에서 내가 앞서 상대방 팀의 선수가 보여주었던 할루시네이션을 그대로 따라했을 뿐만 아니라 더 멋진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할루된 질럿을 마인위로 걷게 하고, 할루된 셔틀을 테란 진영 뒤쪽의 터렛위로 던져 나의 질럿을 방해할 벌쳐들을 유인하는 컨트롤에 당대 최고의 테란은 분한 표정으로 피가 배어나듯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렇지 뭐. 한번 본건데"

사실 내가 할루시네이션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순히 그 한번의 마법, 할루시네이션 만은 아니다. 물론 이제는 나의 주특기가 되었지만, 무빙 머린 컨트롤, 숨겨 드랍후 드랍쉽 멀티 위로 날리기, 상대방 본진 구석에 지은 로보틱스 등은 모두 어디선가 다른 게이머가 했던 플레이들을 그대로 학습한 것이다.

사실, 나는 따로 전략을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과 같은 조건이라면, 내게는 빠른 학습능력과 빠른 손이 있으니까. 그들이 그린 그림이라면 내가 더 정확하게 그려낼 자신이 있는것. 모방화가가 만들어낸 작품이 미술관에 걸려지듯, 나의 기술은 원작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뛰어난 모습으로 완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태어나곤 한다. 수많은 전략과 컨트롤. 아무도 나의 플레이를 알수 없다는 것. 과연 내가 지금 짓는 건물들이, 내가 생산해 낸 유닛들이 그대로의 의미를 가진 "진실'일지. 상대는 그 환영에 사로잡혀 맴돌다 꺼꾸러 지고 만다.

전략의 고민이라는 것이 불필요해진 채, 나는 여전히 만년 2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위의 상금을 독식한다는 것도 꽤나 배부른 일이거니와, 전략을 연구할 시간을 절약한 나는 늘 시끄러운 음악속에 내 머리를 내맡긴다. 특히나 경기전날이라면, 그 시끄러움은 견딜수없는 난수표가 되어 내 안의 많은 "꺼리들"중 하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끄집어 낸다. 나 조차도 나의 손이 만들어내는 것이 모를 정도의 몽환. 그것만이 나를 지탱해 왔다.

오늘 역시 내가 마지막으로 이겨야 하는 경기에 지나지 않는다. 4강전. 그것으로 족하다. 복사본이 1위가 되는 세상에 대한 도덕적인 푸념들에 내 삶을 깎아먹을 필요는 없다. 언젠가 보았던 1게이트 질럿의 셔틀 드랍과 리버 드랍으로 경기를 끝내면 그만이다. 다음 게임은 상대 종족에 따라 결정할 뿐.

어줍잖은 랜덤유저라고 게이머들이 시시덕 거리는 것을 들었다. 퀭한 눈. 내가 머물던 어느 날들이 생각나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고개를 홱 돌리고 마우스를 잡는다.

"준비 되셨죠?"
"아, 저기 인텔리 드라이버 설치 좀 하구요."
"두분다 설치하시는 군요. ipx로 되어있느니 파일을 끌어오시죠"

첫게임은 쉽게 끝이 났다. 파일런 소환후 배터리까지 지어 리버를 이용한 공격을 막을만한 유닛이 저그 본진에는 없었다. 초반 6질럿 연속 드랍이라는 강수를 던진 나에게 상대는 역러쉬를 한번 하고는 쉽게 gg를 선언했다.

프로토스? 이래서 작은 대회는 안된다니까... 종족을 바꾸다니. 난수표을 찾았다. 역시나 저그가 나왔다. 그리고? 그래. 뮤탈이라. 좋군. 뮤탈을 적절한 타이밍에 하이템플러 위에 올려놓아 하이템플러를 자살시키는 일 쯤이야. 픽셀단위로 조절이 가능한 일이다. 초반의 하드코어라도 할 모양이지.

6시라. 맘에 안드는군. 12드론으로 스포닝을 지으며 하드코어 질럿에 대비하고, 앞마당에 해처리를 지었다. 8시의 프로토스에서 출발해 온 프로브가 방해했지만 순간적으로 드론을 뒷걸음질 치게 만들며 쉽게 지어냈고, 저글링 6마리가 1질럿 1프로브의 러쉬를 막는다.

3해처리로 저글링의 훼이크 후 드론 생산이었지... 책을 읽어내려가듯 순탄한 빌드. 분명 해설자는 또 누군가의 빌드와 비교하며 그 매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좋은 지적이다.

오버로드를 아무리 돌려도 1게잇과 코어, 그리고 포지 밖에 보이지 않는다. 숨겨서 아둔을 지었나?

!

본진깊숙히 들어오는 셔틀 한 대. 어느새 4질럿이 내리기가 무섭게 랠리된듯 스파이어를 친다.

이런.. 하지만 라바는 뮤타로 바꿨어. 괜찮아.

4질럿 이후에 프로브 드랍도 없이 급격히 들어오는 속업셔틀의 리버 1기. 라바를 집중공격한다. 라바가 2개 터지고, 1개의 라바와 앞마당의 2 라바에서 3기의 뮤타가 리버를 공격한다. 본진의 래어가 위태위태하지만 막을 수 있을것 같다. 드론의 피해만 없으면, 이게임은 잡을수 있다.

2 드라군의 드랍. 눈살이 찌푸러진다. 결국 파괴되는 래어. 앞마당에 다시 히드라 덴을 짓지만 성큰이 한쪽 방향인것을 이용한 언덕 드라군. 결국 gg였다.

정신없이 한 게임이 더 지나가고. 얼마만인지 결승전 자리에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서 나왔다. 재수 없는 날이군. umai=)~HaLLu. 꽤 웃기는 복사꾼이 또 하나 나왔군.

그녀석은 결승전에서도 1승1패를 반복했다. 똑같은 빌드의 사용. 프로토스대 프로토스의 경기를 5게임이나 본 관중들은 꽤나 지겨웠다는 평가지만, 마지막에 그녀석이 할루시네이션을 썼다는 이야기는 맘에 들지 않았다.

편하게 좀 쉬지.
그러죠. 며칠 놀다가 들어갈께요.
그래.

...

그리고 연습실에 찾아갔다. 오랜만에 리플레이나 보면서 베낄만한 상대를 찾아야겠다. 그런데?

인사하지. umai=)~HaLLu 이친구가 우리팀이 되었네. 이틀전이야. 이제 Swallow_HaLLu 가 되었지만. 암튼 잘지내게.

기분나쁘군. 몇개만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그녀석 역시 게임은 하지 않고 플레이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할루... 반갑군.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게임을 본다. 어제 과음한 눈이 충혈되고 감겨온다.

.

저 일어나시죠. 다들 열심히 하는데.

누가 벌써 선배에게... 녀석은 괜히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본다. 조용하지 않지만 맘에 들지 않는 기분. 눈을 비비고 안경을 쓰며 이녀석을 어떻게 혼내 주어야 하는지를 짧게 고민하지도 못한채.

사방에는 똑같은 화면에서 똑같은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키보드 하나의 소리마저 울림으로 들렸다. 내 어깨를 친 녀석은 어느새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고.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그 똑같은 움직임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 이게 무슨...

그녀석들의 몸은 하얗다 그리고 군데 군데 띄는 파란빛. 그리고... .

펑.

사라지는 플레이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되는 화면과 플레이.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때에 왜 나는 얼굴을 적셔 거울을 보았을까. 그리고, 그리고,

왜 내 살갗 아래 푸른빛이 하얗게 빛나는 것을 외면하지 못한 것일까.













"일어나시죠. 전략을 좀 배우고 싶은데요. 그 할루시네이션 어떻게 하신 거에요?"


....................................................................by 항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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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근데, umai)hallu는 무슨 뜻? 우마이는 일본어로 맛있다는 건데......... 해석이 안됨.
장현영
아주 좋은 글...^^ 이제 전부 문학소년,소녀가 되어가는 듯...ㅋㅋㅋ
Apatheia
02/01/16 01:03
수정 아이콘
so good ^^
나는날고싶다
02/01/16 01:14
수정 아이콘
^^; 순간적으로 섬짓한..-0-; 스거 하셨어여..(_ _)
02/01/16 01:23
수정 아이콘
멋찐글인듯 ^ ^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번 써볼 계획.....ㅡㅡ...
저기..소설 내용 해석이 잘 안되는데...-_-;;
마지막 부분이 무슨뜻인지?
홍차소녀
04/10/12 18:26
수정 아이콘
멋진 글이네요. 퍼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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