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2/01/31 14:48:22 |
Name |
Apatheia |
Subject |
[잡담] 다모클레스의 칼. |
(여기저기서 돌맞을 각오를 하고 쓰는 글임을 밝히며.)
요즘 왕중왕전 경기를 보며, 알수없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스카이배 준결승에서
'감히' 황제에게 반란을 꾀했던 한 패기만만한 젊은 기사를 응원했던 사람으로서
불과 한달남짓 사이에, 이렇게나 지쳐버린 황제의 모습이
내게는 참으로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하기 때문이겠다.
그 준결승날, 내 눈에 비친 황제는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았다.
경기에 임하는 그 특유의 담담함
그러나 그 뒤의 저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자의 여유...
그는 무표정했지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경기가 길어질수록 더욱 차분해지고 견고해지는 그를 보며
아직은 때가 아니로구나 하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는 없었었다.
적어도, 그날의 그는 그렇게 보였다.
매너리즘일까.
3:2라는, 수치적으로는 팽팽한 접전 끝에 그가 패하던 날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승리, 이젠 더이상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걸까.
이겨야 될 이유도 목적도 상실해 버린 걸까.
아니, 상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시 잊어버린 걸까.
그의 행보앞에 무너진 그 수많은 벽들을 떠올려 볼때
그런 추측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어떤 고수는 거듭되는 승리에 지쳐
이름을 '패(敗)를 구한다'는 뜻의 구패(求敗)로 바꾸었다고 하지 않던가.
승리의 쾌감은 황홀한 것이지만 그만큼 중독되기도 쉬우리라.
그래서, 쉽사리 사람을 황폐하게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니까.
이젠 조금쯤, 그를 염려한다.
전에 없이 핼쓱해진 안색과 피곤함에 절은 눈매를 걱정한다.
워낙에 대단한 사람이니 곧 괜찮아질 것이라는
내가 믿는 선수의 평을 나 또한 수긍하면서도
모니터앞에 앉은 그를 바라보는 마음 한구석이 어딘지 불안한 것은
이제야 그가, 100% 승리를 보장하는 빌드오더로 프로그래밍된 기계가 아니라
충분히 상처받을 수 있고 충분히 지칠 수 있는
스물 세살 어린 청년임을 알아버린 탓이겠다.
다모클레스의 칼...
옛날 그리스의 어느 나라에서는
왕위를 칭송하던 어느 사람을 왕위에 앉히고
그 머리 위에 머리카락 한 올로 칼을 묶어 매달아놓았다고 한다.
왕, 황제, 혹은 절대자...
최고의 자리에 따르는 숙명적인 고독과 불안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황제는
이제야 그런 것을 깨닫고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높고 그럴듯하게만 보였던 왕좌에 앉아있다가
어느날 문득 고개를 들어보고
자신의 정수리 위에 위태하게 매달려있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보고
문득, 자신의 그 자리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자리인지를
느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 언젠가 그는
최강자의 자리에 앉은 뒤 느끼게 된 필연적인 고독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다시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최강자의 자리를 버리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차라리 고독을 씹고 말겠다는 답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이 당신이다, 황제여.
아직은 무너질 때가 아니다.
영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될지라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황제여.
-Apatheia, the Stabl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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