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2/02/09 22:38:54 |
Name |
Apatheia |
Subject |
[잡담] 메가웹 블루스 |
메가웹 스테이션...
화면에는 그토록이나 거창하고 화려해 보이는 그곳은 실제로는 그냥 PC방에 지나지 않는다. 스테이지 앞엔 사람이 앉을 공간도 그리 크지는 않고 말이다. 다만 규모가 좀 크고 중앙 무대와 방송 장비가 빼곡히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 일반적인 겜방과는 조금 다를 뿐...
방송이 시작되기 두 시간쯤 전, 언제나 그렇듯 디지털 카메라를 둘러메고 메가웹으로 들어가 휴게실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쓱 주위를 둘러본다. 이 시간까지는 아직 낯익은 얼굴들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몇 달째 메가웹에 금요일마다 출근하면서 알게 모르게 눈에 익어버린 온게임넷의 스텝들 몇명이 진을 지고 앉아 잔뜩 지친 얼굴로 잡담을 나누며 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한개의 리그가 진행되는 대략 석달의 기간동안 온게임넷 스텝들은 두 번 정도 귀가를 한다고 한다.
여덟시부터 대략 11시 정도까지 진행되는 생방송에 온갖 촉각을 다 세워야 한다. 생방송이란 언제나 그렇듯 언제 어느 부분에서 무슨 사고가 터질지 알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방송에 사용되는 컴퓨터에는 OS와 스타 말고는 아무 것도 깔려있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멀쩡히 돌아가던 게임이 느닷없이 드롭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정말 뜨거운 석판 위에 올라간 고양이처럼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기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 게임이 끝나면 어김없이 재부팅을 해 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또 가끔 컴퓨터의 심사가 틀어져 IPX 설정이 어긋난다든지 하는 사태라도 발생을 할라지면, 스튜디오에서 경기를 중계하는 베테랑 해설자 세사람에게 몸빵을 맡기고 온 스텝들이 다 달라붙어 컴퓨터를 달랜다. 영문을 모르는 관객들의 아 거 말 많네...라고 불평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라도 할라치면 그들 또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그렇게 그렇게 근근히 컴퓨터를 달래어 설정을 맞추고 나서는 선수들을 자리에 앉히고 다시 다음 게임을 진행한다. 그러니 그들에겐 경기 내용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관심밖일 수 밖에 없다. 말없이 탈없이, 진행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이니까.
30분쯤 지난 6시 30분경이 되면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선수들 뿐 아니라, 메가웹을 자주 다니다보면 저절로 눈에 익는 각 선수들의 팬카페 운영진들 및 현장파 팬들도 하나 둘 도착해 자리를 잡고 일주일간의 안부를 묻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팬들의 관심사는 어쩔 수 없이 응원하는 선수들에게로 돌려진다. 오늘 이길까. 이겨야지. 이길 거야. 잘하잖아. 내가 어제 베넷에서 연습하는 걸 봤는데... 오늘 컨디션이... 그러고 있노라면 저 편, 메가박스 영화관의 푸른 불빛을 받으며 오늘의 주인공들이 하나씩 등장한다. 들어오자마자 팬들과 인사를 나누며 떠들썩하게 등장하는 선수들도 있고, 들키면 안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히 걸어와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과 살짝 눈인사만 나누고 안으로 종종걸음을 옮기는 선수들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안쪽으로 사라졌던 선수들은, 대부분 잠시 후엔 다시 밖으로 나와 팬들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건네고 오늘의 각오라든지 준비해온 빌드라든지 하는 것을 간단히 브리핑하게 마련이다.
어디서나 있는 눈썰미 좋은 사람들. 그 복잡한 메가웹 스테이션 안에서, 경기복도 아닌 평상복 차림의 선수들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저기 *** 선수 맞죠? 싸인 좀... 하고 노트와 펜을 내미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띠고 선수가 펜을 집으면 그 주변엔 가벼운 혼란이 일어난다. 알아는 보고 있었으나 미처 말을 건네지 못했던 사람들, 미처 그 선수를 알아보지도 못했던 사람들, 막 안으로 들어오다가 사람들이 몰려있는 걸 보고 뭔가 하는 호기심에 괜시리 한몫끼는 사람들... 이렇게 붙잡힌 선수는 보통 짧게는 10분, 길게는 30분 정도 즉석 싸인회에 붙잡혀야 한다. 이름을 물어보고 백지 위에 정성껏 싸인을 해서 내미는 선수나, 그 어찌보면 '별것 아닌' 종이쪽 하나를 받아들고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함박웃음을 머금는 팬들. 베틀넷 안에서나 존재하던 전설의 고수가 모니터를 뚫고 튀어나와 옆을 스쳐가는 그 기분이란. 싸인을 하는 사람, 받는 사람, 보는 사람까지, 한결같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기분 좋은 광경이다.
이 후의 행보는 선수마다 다르다. 비는 컴퓨터를 잡고 마지막 빌드 연습을 하는 성실파도 있고 동료나 팬들과 잡담을 나누며 긴장감을 눅여보려는 선수들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방송시간이 가까워오면 담당 FD들이 선수들을 찾으러 다닌다. 호명을 받은 선수의 얼굴은 그 유명세나 실력과 상관없이 잠시 굳어진다. 그러나 곧 여유를 되찾으며 그는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그 등 뒤로 쏟아지는 게임 잘하라는 유언무언의 격려들. 한 손을 들어 그 인사들에 답하고, 그는 잠시 현실을 떠나 게임 속으로 들어간다. 더러는 마린이 되어, 더러는 질럿이 되어, 더러는 오버로드가 되어.
짧게는 10여분, 길게는 30분 넘게까지 게임은 흘러간다. 교차하는 탄성과 환호와 탄식... 아, 저 빌드를 쓰나요? 이거 좋지 않은데요, 멀티 체크가 전혀 안되고 있어요. 아... 들켰죠. 다소 불리한데요, 자원차가 상당히 나거든요. 아, 이렇게 되면 알 수 없죠? 너무 잘하네요... 해설자들의 멘트 한 마디 한 마디에 희비가 교차하며, 순간 메가웹 스테이션 안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눈은 여기저기 설치된 스크린에 붙박힌다. 아~하는 탄성 몇 번, 그리고 박수 소리, 교차하는 환호성... 네... GG~! 끝을 알리는 멘트 한마디에 팽팽했던 긴장감은 일시에 깨어지고 승자와 패자의 희비가 엇갈린다. 다음 게임 준비를 위해 스텝들은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하고, 승자 쪽에선 웃음꽃이 만발하고 패자 쪽에선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경기를 마친 선수는 대부분, 경기복도 채 갈아입지 못하고 다시 팬들 쪽으로 온다. 이긴 선수라면 별 말없이 웃기만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괜시리 어색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도 잘 꺼내지 못하고 미적대는 경우도 많고... 괜찮아요 수고했어요 잘하셨어요. 이런저런 인사가 오간다. 거기서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으면... 안타까운 마음에 어느 팬이 말을 꺼낸다. 그렇죠? 역시 그랬어야 했죠? 아... 그때 가스가 모자랐어요. 제가 아까 8시 멀티를 밀렸잖아요. 그것만 안밀렸으면... 조금은 풀이 죽었던 선수의 말소리에 대번에 힘이 들어간다. 아쉬움, 안타까움, 그러나 그에 앞서는 게임에의 열정. 잠시 선수와 팬들은 경기 결과도 망각한 채 오늘의 경기 내용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친다. 결국 이만저만한 점이 패착이었다 는 결론이 나면 다시 분위기는 조금 수그러들고, 옆에서 그 경과를 지켜보던 다른 팬 하나의 밥 먹으러 가죠 나 슬슬 나가 볼까요 라는 말 한마디로 상황은 약간은 싱겁게 정리된다.
언제나 후덥지근한 메가웹을 나와 코엑스몰 앞마당으로 나오면 싸늘한 밤바람이 가슴을 파고 든다. 으으 추워... 잠시 어깨를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지하철 역까지의 멀지 않은 거리를 종종걸음친다. 다음 주엔 이기실 거죠? 그럼요 꼭 이겨야죠. 게임이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팬들에게 큰 빚이라도 진듯 선수는 대답하고, 팬들은 또 그런 선수가 한없이 안타깝고 안스럽다. 괜찮아요, 오늘도 충분히 잘하셨어요.
그렇게 헤어진다. 시간은 이미 11시도 훨씬 지난 시간. 각자 가는 길을 물어 더러는 전철을 타고 더러는 버스를 타고 또 더러는 택시를 타고, 잠시 메가웹이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를 몸살나게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환영에서 깨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일주일 후, 그 날의 달콤한 승리를 꿈꾸면서 말이다.
메가웹 스테이션...
화면에는 그토록이나 거창하고 화려해 보이는 그곳은 실제로는 그냥 PC방에 지나지 않는다. 스테이지 앞엔 사람이 앉을 공간도 그리 크지는 않고 말이다. 다만 규모가 좀 크고 중앙 무대와 방송 장비가 빼곡히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 일반적인 겜방과는 조금 다를 뿐...
그러나 그 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는 잠시 이상한 나라로 여행온 폴과 그 일행이 된다. 손뼉을 치고 비명을 지르고 환호성을 올려도 아무도 이상한 눈길을 보내지 않고, 게임과 게이머와 게이머의 팬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참 쉽고도 단순한 동류의식 하나로 우리는 참 쉽게도 마법에 걸려든다. 열에 들뜨고 가슴이 설레이는 마법에. 패배마저도 달콤한 마법에...
-Apatheia, the Stable Spirit.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