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2/02/13 09:36:39 |
Name |
항즐이 |
Subject |
프로라는 이름을 위하여 2. 승리를 향한 자세 |
프로라는 이름을 위하여
2. 승리를 향한 자세 (1# of 2)
The Early Bird
누군가는 그가 요즘 스노보드를 탄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가 승리를 위해 종족을 바꾸고 마지막 랜덤에서 떠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말하는 것은 가장 완벽에 가까운 랜덤이라기 보다는 그저 The Early Bird라는 말이다.
경인방송에서 처음으로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 긴 게이머 생활동안 화내는 얼굴한번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람. 헤어지는 자리에서 나는 아차하며 그의 개인적인 일을 아무것도 묻지 못한 어리숙한 나의 주변머리를 두드렸다. 얼마나 매정한 매니아가 되어버렸을지 내 첫인상을 걱정하며. 그 사람을 나는 KPGA예선 대회장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부지런을 떨며 스태프로서 자리 점검을 하고 있을 즈음, 집합 시간이 뒤통수를 긁어보기도 전에 그는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나에게 앉을 자리를 부탁했다.
몇몇 선수들이 이미 들어와 있던 시간, 게이머들이 오랜만에 만난 즐거운 수다에 그는 낄 자리가 없었던 것일까. 게이머들이 늘 주고받는 또 똑같지만 또 새롭고 재미있는 게임 이야기를 흘낏 듣기라도 하는지. 그는 의자에 몸을 묻히고 묵묵히 자신의 경기를 다시 본다.
내가 pgr21에서 자신의 이름을 클릭하면 경기 목록을 볼 수 있다는 걸 알려주자 무척 좋아하는 그. 몇 경기쯤 보았을까? 그는 자신의 대전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진행을 위해 분주한 나를 발견하고 미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언제나 그를 설명하는 말은 최고의 랜덤유저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혹은 검하나를 들고 비무를 신청하는 날렵한 낭인에 곧잘 근접되었다. 하지만, 설사 그가 낭인이라 하더라도 나무 아래에서 선잠을 깨자마자 습기찬 검을 다시 손질하는데 분주한 사람이 아닐까.
처음 보는 필부와도 몇 시간이고 검에 대해 논하기를 꺼려하지 않는 사람, 아니면 시험 날 아침 일찍 와서 책을 다시 펼쳐 차분히 눈을 옮기는 친구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The Early Bird 최인규 선수, 나는 그의 하늘이 보인다.
아는 것은 즐기는 것을 당해내지 못한다.
약관에 못 미친 나이, 하지만 천지무용(天地武勇:無用과 구별을 위해 적음^^)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온 맵을 뒤덮으며 내달리는 그의 게임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충분히 익은 숙련된 장군의 지휘가 생각난다.
그는 자신이 처음 병졸로 전장을 내닫던 때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어설픈 기억들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그 동안 많은 명장들이 수도 없는 전투를 했음을 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상처를 입어도 아물기를 참지 못하고 또 달리고 싶은 성장기의 맹수와 같다. 또 사냥감과의 추격에서 승리하고, 그 포만감을 얻고 싶은 어린 송곳니 짐승이다. 그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고 또 천진한지. 우리는 늘 어린 사자에게서 두려움을 잠시 잊는다.
"점수 올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자꾸 게임하고 싶어져요." 분명 승부를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승부를 즐기는 어린 사자를 만나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심바는 곧 그 초원을 좁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늘 앙다문 입술은 꼭 웃는다.
정재호라는 게이머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름일 수도 있는. 그는 수없이 많은 저그 유저 중의 한 명이며, 수없이 많은 아마추어 고수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아마추어와 저그라는 이름을 가장 열심히 장식하고 있는 선수이다.
나는 그의 게임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그와 일면식도 없는 까닭으로 직접 게임에 들어갈 기회를 잡아보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늘 서버에 머물면서 그가 많은 게임을, 정말로 많은 게임을 하고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에게 따라다니는 고통스러운 이름도 안다. "온라인 최강" 온라인 대회에서 항상 상위의 성적을 거두고, 오프라인 대회에서 쉽게 무너지는 그의 특성은 오프라인 징크스에 시달리는 유명한 몇몇 아마추어 게이머들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 그만큼 그는 온라인에서 많은 게임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그는 수많은 대회에 출전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조그마한 상금에도 욕심을 낸다고 생각했을 만큼. 하지만, 어쩌면 그는 게임에 대한 욕심이 너무나 많은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친하게 지내는 한 선수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정재호 선수를 오프라인에서 만나고 그를 존중해야할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모습이라는 것은 그가 게임을 지고 나서 공손히 말을 건넨 후, 좌우를 살피고 시간이 있음을 알게 되자, 마우스를 치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패배를 다시 살펴보는 자세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선수들이 패배 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황급히 그곳을 떠난다. 마치 패배감을 조금이라도 묻혀 가게 될까봐 두려운 듯이.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처음과 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분명 입술은 앙다물었을 것이다.
비록 그의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KPGA 예선에서 자신이 지고 나서도 다시 자신의 경기를 살펴보던 장진남 선수의 표정과 같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재호 선수, 그도 분명 그 입술을 풀고 승리의 소감을 말하며 웃을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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