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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2/02/18 18:32:11 |
Name |
Apatheia |
Subject |
[잡담] the Fan |
지난 KPGA 예선이 있던 날이었다. 대부분의 선수들보다도 더 먼저 대회장에 도착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아침도 굶고 경기에 참가할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모듬초밥까지 한 찬합 싸들고 왔었다. 그 선수는 경기장에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곳이 숙소였고 그녀의 집은 거기서 제법 멀었는데도. 그날 그 선수는 초반에서 그만 탈락하고 말았는데, 그녀는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아... 오빠 기분 많이 상했겠어요. 어떻게 하죠? 아침잠을 설쳐가며 일찍 나온 자신의 성의가 허사로 돌아간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SKY배 16강 본선. 그다지 지명도가 높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꽤 선전한 저그 유저가 한 사람 있었다. 그를 위해서 그의 팬 한 사람은 그의 상대가 될 선수의 리플레이 수십개를 구해서 보고 빌드를 연구해서, 그 선수가 뮤탈리스크 싸움에 약하고 저글링+스컬지라는 흔치 않은 조합을 선호한다는 등등의 상당한 자료를 만들어 선수에게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선수는 다른 경험많고 노련한 선수들의 벽을 넘지 못해 8강 진출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삼성동 메가웹 스테이션. 거의 매주 경기가 열리는 그곳에 가보면 몇가지 점에 놀라게 된다. 생각보다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에, 그리고 의외로 소탈하고 인간적인 선수들의 모습에, 그리고 그 자리를 메우는 팬들의 면면이 거의 매주 똑같다는 점에. 그래서 그 곳에 한달 정도만 가 보면 인사 한마디 하지 않고도 저 사람은 누구네 카페 시삽, 저 사람은 누구 팬, 저 사람은 어디 소속...하는 것을 전부 알 수 있게 된다.
생방송 중계 최장기록을 세웠다는 2001 KPGA Winners Championship 준결승전. 그날의 경기는 저녁 8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2시에 끝났다. 그러나 경기가 끝났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스텝과 해설진과 선수들 뿐만이 아니었다. 20여명 남짓한 팬들도 그 늦은 시간까지 그들과 함께 발을 구르고 목이 쉬고 마음을 졸이며 안타까워했다. 그들 또한 그 길고 지리한 전투를 함께 했으며, 그 버겁고 힘겨운 승리를 함께 했고 그 안타깝고 애석한 패배를 함께 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 선수를 사랑하는 사람들. 가끔은 생업까지 소홀히 해 가며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막차 시간에도 아랑곳없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남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GG가 떨어질 때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승패와 상관없이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팬'이라고 한다. 아무런 댓가없이 그 곳에 나타나 방송용 화면을 채우는 말없는 관중의 역할을 도맡고 환호성 내는 박수부대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선수들의 싸인 한 장에 고마워하고 실제로 본 멋진 게임 하나에 즐거워하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현장을 다니다보면 그들의 댓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열의에 가끔 놀라게 된다. 선수들처럼 그 경기 한 번에 명예나 수입이 걸린 것도 아니면서도, 굳이 현장에 찾아와서 혹은 TV로라도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 개인적으로 아는 어떤 선수 하나는 '자기 일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 일처럼' 그렇게나 승리에 기뻐하고 패배에 가슴아파 해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가끔은 신기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결코 주인공일 수는 없는 사람들. 드러날 수도 없고 드러나기를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 그러나 사실은 리그와 경기 자체의 존재이유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팬'이라고 한다.
하나의 경기가 끝나면, 또 하나의 리그가 끝나면 수많은 스타 관련 게시판은 그 게임에 대한 각종 감상들로 넘쳐난다. 누구누구의 바이오닉 컨트롤에 관해서, 누구누구의 더블넥서스 타이밍에 괸해서, 또 누구누구의 저글링+뮤타 조합에 관해서 등등. 그러나 그것이 경기의 전부는 아니다. 게임의 전부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경기의 전부는 될 수 없다. 경기가 경기일 수 있는 마지막 요소는 팬이다. 선수의 컨트롤 하나하나에, 빌드 타이밍 하나하나에 박수치고 환호하고 더러는 아쉬워하는 팬들이 있기에 경기는 경기일 수 있는 것이다.
끝을 내는 것은 배틀크루저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인터셉터로 적의 조이기 라인을 뚫어내는 것은 캐리어일지도 모르며,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적의 GG를 받아내는 것은 가디언이나 울트라리스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임의 초반에 만들어져서 끝날때까지 같은 자리를 맴돌며 미네랄을 캐고 가스를 캐는 일꾼 유닛이 없다면 그런 고급 유닛들이 활개를 치고 뻗어나가 적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어쩌면 태어나는 것조차도 불가능하지는 않을까.
게임을 하는 것은 선수이다. 그러나 리그를 지키고 지탱하는 것은 결국 팬들이다. 언제나 그곳에 서서 묵묵히 박수를 보내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어린 애정과 축복을 보내며. 임요환도 김정민도 홍진호도 김동수도, 결국 그대들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Apatheia, the Stabl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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