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4/10/23 22:34:08 |
Name |
박진호 |
Subject |
아버지와 나 |
신문이 현관문을 툭 치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토요일이다.
출근할 일도 없는데 5시에 눈이 떠지다니.......요즘 들어 새벽잠이 없어졌다.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신문을 꺼내 식탁에서 한참 읽고 있으니 아내가 일어났다.
“당신은 휴일인데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요.”
“그러게 잠이 안 오네.”
아내는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 싱크대로 가 물을 틀었다.
“촤악.”
20년이 넘게 반복되는 아침 시작 소리다.
“지석아 밥 먹어라.”
아들 녀석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대학에 들어가고부터는 같이 아침을 먹는 일이 없어졌다.
밤새 컴퓨터 하다가 늦게 잤겠지.
“여보 점심에 지석이 깨워서 국 데워 먹어요.
냉장고에 빨간통이 김치고 랩에 씌워 놓은 거 전이니까 전자렌지에 돌리고.”
토요일에도 학교를 가는 아내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정신없이 구두를 끌며 나갔다.
물 한 잔을 가지고 습관처럼 거실 쇼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어릴 적 처음 티비를 봤을 때부터 그다지 내용이 바뀌지 않는
소위 ‘아침드라마’가 한창이다
43번.
손이 알아서 채널을 돌린다.
“네 지금 위험해요. 이윤열 선수 골리앗 없죠.
저 레이스를 뭘로 막나요. 최연성 선수 역시 엄청납니다.”
어제 경긴가. 캐스터의 긴박한 목소리가 지루한 아침을 힘차게 한다.
내가 저들을 본 것도 20년이 넘었다. 지석이 나이 또래 때 처음 본 사람들인데.
계속해서 치고 오는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아 쥐쥐.”
“최연성 선수 8강 2경기 잡고 승부를 원점으로 돌립니다.”
“아 아버지 시끄러워요.”
아들 녀석이 베개를 끌어 앉고 밖으로 나와 쇼파에 눕는다.
“지석아 밥 먹어야지.”
“아....... 몰라 몰라. 소리 좀 줄여요. 아침부터 스타에요.”
아들의 잔소리에 방으로 피신해 컴퓨터를 켰다.
바탕화면은 요즘 유행하는 게임들의 바로가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과연 공부는 언제 하는 건지. 한 소리 해야 할 거 같긴 하지만 다 큰 녀석에게
뭐라 하는 건 이젠 어렵다. 어릴 적엔 회초리도 들고 그랬는데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녀석에게 회초리를 드는 나는 ....... 웃기다.
화려한 아이콘들 사이로 이제는 촌스러워진 하지만 낯익은 레이스 아이콘을 클릭 했다.
한산한 아시아 공방. 젊을 적 강호를 누비던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
패배가 두려워 밤 새워 마우스 포인터를 돌리며 연습하던 치열함은 어디로 갔을까.
/stats
barigo_rara's record:
Normal games: 10892-4020-582
Ladder games: 0-0-0
/join pgr21
barigo_rara: 님 한게임 하실래요?
nada_oldfan: 네 종족이?
barigo_rara: 테란입니다.
nada_oldfan: 저도. 방번 주세요.
배럭스에서 나오는 한 명의 마린. 에스시브이 친구와 함께 입구를 지키던 보초를 뚫고 적진을 확인한다.
투 스타포트가 올라가고 있다.
마우스를 잡은 손이 바빠진다. 급히 아머리를 올린다.
다시 적진을 확인하니 마린은 이미 피만 남겼고 에스시브이는 벌쳐에게 마지막 수류탄을 맞고 있다.
“펑”
“펑! 펑! 펑!!”
barigo_rara: GG yo
nada_oldfan: gg
방금 본 경기대로 되지는 않는군. 역시 나다는 강해. 일주일만에 한 게임. 사그라졌던 승부욕이 되 살아났다.
“아버지 또 졌지?”
한 게임 더 부탁하려 하는 데 방문이 열렸다.
“그래.”
이제 잠이 깼는지 지석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표정은 졸려 있다.
“아 뭐 그런 걸해요. 스타 4가 나온지가 언젠데. 속도도 느리고 그래픽은 저게 뭐야.
2D에다.”
컴퓨터를 뺏겼다. 밤 새 했을 텐데 또 게임을 시작한다.
“아버지 요즘은 이런 걸 해야돼요. 한 번 해봐요.”
“됐다 녀석아.”
뭔지도 모를 정신 없는 영상이 모니터에서 돌아다닌다. 마치 실제 세상이 거기에 들어있는 듯 하다.
진짜 사람. 진짜 탱크. 진짜 비행기 같다.
“지석아 밥 먹자.”
방 안은 열기로 가득하다. 컴퓨터가 돌아가는 것도 있겠지만 지석이가 아무래도 열기의 주원인거 같다.
“지석아 밥 먹자고.”
“잠깐. 이것만 하고.”
“.......”
“에이.”
씩씩 거리는 걸 보니 졌나보다.
“아버지 나 한판만 더 할께. 얘만 이기고. 한 20분이면 될 꺼야.”
지석이가 어릴 적, 스타를 가르쳐 준다고 컴퓨터를 한 대 더 샀던 게 기억난다.
아들과의 팀플. 혹은 아버지 오늘 10000원빵 스타 한판 해요. 뭐 이런 걸 기대했었다.
처음엔 몇 번 곧 잘 하더니 언제부턴가 그만 두고는 다른 게임을 했다.
그게 아마 나한테 10연패 하고 난 다음이던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는 안한다고 밖으로 나가던 녀석이 보인다. 그 때부터 승부욕은 강했지.
그 때 내가 몇 판 져줬으면 지금 쯤 프로게이머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저렇게 해도 매일 지는 걸 보면 나처럼 재능이 없는 거 같기도 하다.
지석이가 드디어 방을 나왔다. 웃고 있다. 이겼나보다.
“아버지 내가 밥 차릴게.”
오랜만에 아들과의 점심 식사. 지석이에게는 아침이겠군.
어제한 밥인데도 맛있다. 국 간도 적당하고. 오늘 아침은 성공했구려 부인.
“지석아 성적표 나왔니?”
“아.. 아니 그게 몰라 1월달에나 나올걸.”
미안하다 아들아 밥 맛 없게 해서. 그러게 아버지 컴퓨터는 왜 뺏니.
두고봐라 나다!
다음주에는 이겨주마.
.
.
.
.
.
.
“딱. 딱.”
“자 이제 여기 잠깐 볼까요. 조훈현 구단 여기서 이렇게 젖혔는데요.
여기서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창호 구단 이렇게 두니 맛이 안 좋네요. 선수도 뺏기고. 좌상변에 백집이 너무 커요.”
아 저건 또 무슨 소리냐. 아버지는 또 새벽부터 바둑을 보신다. 아 4시간도 채 못 잔거 같은데. 죽겠다.
베개를 품에 앉고 거실로 나갔다.
“아 아버지 시끄러워요.”
“지석아 밥 먹어야지.”
“아....... 몰라 몰라. 소리 좀 줄여요. 아침부터 바둑이에요.”
주 5일제가 되고 나서는 아침 밥을 먹으라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토요일 아침은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아침을 먹은 지 꽤 오래 되었다. 대학교를 다닌 뒤로는 늦잠의 연속이었으니.
아 아니다. 아침을 먹은 지 꽤 오래 된 거 같다.
‘펑! 펑!’
머린 한기가 정찰을 가는데 갑자기 시즈 탱크의 포격 소리가 들린다. 뭐지 벌써 탱크가 나오다니.
어느 새 탱크는 내 입구 앞까지 왔다. 에스시브이를 총 동원해 갓 나온 벌쳐로 겨우 막아 내었다.
‘뿅. 뿅’
어디 선가 레이스가 날아와 에스시브이를 괴롭힌다. 뭔가 이상하다. 난 이제 방금 팩토리가 올라갔는데.
황급히 엔지니어링 베이를 짓고 터렛 신공으로 막았다. 말리는 군.
‘쁑. 쁑.’
뭐야 배틀크루져. 말도 안 돼! 이런게 어딨어.
barigo_rara: u mineral hack!!!
nada_jjang: u chobo kkkk
'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k ak 아아앜‘
무수히 많은 k가 나를 비웃으며 야마토 포를 쏜다.
뭐지. 뭐지.
순간 눈이 떠졌다. 천장에 새겨진 빗살 무늬가 보인다. 꿈이군. 어젯밤 친구와의 테테전을 하다 진게 계속 남아있나 보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배틀크루져가 둥둥 떠다닌다. 잘 수가 없다.
모닝스탄가.
스타를 하러 방으로 갔다. 컴퓨터는 내가 자는 새 새로운 주인과 놀고 있다.
“대국이 끝났습니다.”
한판 두셨나 보다. 아버지는 바둑을 잘 두신다. 아마 4단. 아마 스타로 치면 apm300급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 또 졌지?”
“그래.”
가끔 궁금하다. 아버지도 내가 스타를 질 때처럼 바둑을 지면 열이 받을까. 평소 성격으로 봐서는 안 그러실거 같은데.
“아 뭐 그런걸 해요. 이제 바둑의 시대는 갔어요. e-sports 시대라고. 스타가 최고라니까.”
아버지를 밀어내고 컴퓨터에 앉아서 레이스 아이콘을 클릭했다.
“아버지 요즘은 이런 걸 해야 돼요. 한 번 해봐요.”
“됐다 녀석아.”
가끔은 마우스를 이리 저리 굴리며 정신없이 스타를 하는 내 모습에 비해 여유 있게 바둑을 두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
귀품과 여유 속에 승부를 즐기는 사나이의 로망. 뭐 바둑 두는 걸 빼고라도 요즘 아버지의 모습은 여유가 보여서 좋다.
예전에는 정말 무서우셨는데. 일기를 안 썼다며 회초리를 드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제는 잔소리도 잘 안하신다. 나이를 드신건가.
얼마 전 성적이 나왔을 때는 한참 아무소리 안하시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면 잔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물론 성적이 다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학생의 본분은 공부가 아니겠니.......’
라며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던 게 떠오른다.
왠지 서글퍼진다.
셔틀에서 발업 질럿이 떨어진다. 탱크는 서로에게 포격을 가하며 한 기씩 터져 나간다.
황급히 벌쳐로 질럿들을 치워내는데 좁은 통로로 드라군이 끝도 없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런 무식한. 완전 물량이군. 초반 원팩 더블 이후 리버 게릴라에 나가는 타이밍을
놓친 게 실수다. 터렛 위치만 좋았어도.
얼굴에서 열이 난다. 덥다.
“지석아 밥 먹자.”
아 중요한 순간에 아버지가 침입했다.
“지석아 밥 먹자고.”
“잠깐. 이것만 하고요.”
막자. 이것만 막으면 어떻게 될 거 같다. 에스시브이를 동원해서 드라군을 다 잡았다.
시즈 탱크의 스플레쉬에 체력이 많이 깎인 게 행운이었다.
갑자기 슁 소리가 들린다.
캐리어.
barigo_rara: gg yo
"에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barigo_rara: re?
ggomazilot: ok
"아버지 나 한판만 더 할께. 얘만 이기고. 한 20분이면 될꺼야.“
승부심에 온 몸이 불타는 게 느껴진다.
마음을 정리 할 겸 기지개를 켰다. 책장 위에 바둑알 통이 보인다. 어릴 적 아버지와 바둑을 두던 게 기억난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바둑을 가르치려 했다.
처음엔 재미 붙여서 몇 번 했었는데 아버지가 한판도 져주지 않고 매정하게 나를 이기는 것이 상처가 되어 바둑계를 떠났다.
한 20점 정도를 깔고도 진적도 있던 거 같다. 그 때 아마 펑펑 울다 아버지한테 혼났을 거다. 사내 자식이 운다고.
그 때 아버지가 좀 만 나를 친절히 가르쳤어도 만원 내기 바둑 같은 거 하며 놀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음 남자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신가.
요즘은 어릴 때 비해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없다는 걸 느낀다. 오늘만 해도 변변한 대화 한 번 못하지 않았나.
아버지가 스타를 하시면 같이 게임도 하고 재밌을 텐데. 스타는 도통 안하려고 하시니. 내가 바둑을 배워야 할지도.
아 바둑은 너무 어렵다. 배울 것도 많고.
생각해보면 아버지에게도 스타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가 바둑을 배우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똑같은 전략으로 승부했다. 원팩 더블 후, 타이밍 러쉬 하지 않고 커맨드를 하나 더 지었다.
남자라면 물량 아니겠는가. 물량 대 물량에서 승리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는데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난다.
아차 밥.
부리나케 부엌으로 갔다.
“아버지 내가 밥 차릴게.”
오랜만에 아버지와 점심을 먹는다. 아 나에게는 아침이군. 엄마는 맨 날 밥을 많이 한다.
덕분에 오늘도 찬밥을 데워 먹었다.
어! 국이 맛있다. 오늘은 성공했군요 어머니.
“지석아 성적표 나왔니?”
아버지 왜 밥 먹는데 그래요. 밥이 돌이 된 기분이다.
“아.. 아니 그게 몰라 1월달에나 나올걸.”
성적표는 이미 웹상에 떠있는데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아 약한 모습이다.
살짝 아버지를 쳐다봤다. 굳은 표정이 보인다.
이런 이미 아시는 건가.
아버지 죄송해요. 다음 학기에는 공부 잘 할게요.
* hom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10-2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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