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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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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20 21:57
먼저 늦어서 죄송합니다. -_-; 동아리 공연 때문에 글이 써지지가 않더군요. 공연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암튼 그 때문에 몇몇 분들을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독도 떄문에 반일감정이 끓어오르는 마당에 이런 글 써서 좀 꺼림직합니다만, 그리고 특히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원흉이긴 합니다만, 이들의 특성이 매력적이고 우리에게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으니 한번쯤 써봐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일감정과는 별개로 한번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05/03/20 22:06
minyuhee님//물론 동감입니다. 서지훈 선수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 좀 더 변했으면 싶다는 바램인거죠. ^_^
05/03/20 22:51
우선 글 잘 봤습니다..정성이 들어간 글을 보면 기분이 참 좋아져요..
제가 서지훈 선수의 경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말씀하신 그런 면 때문입니다...지훈 선수의 플레이는 항상 밸런스된 느낌을 줍니다..잘 조직되고 잘 짜여져있는 느낌..균형감 질서감... 지훈 선수...경기 도중에 어떤 언밸러스한 플레이라든가 큰 파격을 시도하지 않습니다...그래서 플레이에서 눈에 확 띄는 포인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스타급 센스랑은 좀 다른 얘기 같아요... 경기를 운영하는 걸 보면 순간 적인 상황 판단 등에 있어 센스가 넘칠 때가 많습니다..특히 테테전 같은 경우에서 많이 느낄 수 있죠...눈에 띄는 경우는 위에서 말씀하신 엔베 두개 동시 바리케이트라든지..프로리그 다크를 대비한 무한스캔..드랍쉽훼이크 같은 것도 있구요.. . 전 서지훈 선수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그런 플레이로 인해 서지훈이라는 선수가 제 눈에 띄이게 되었고, 스타중계를 보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지훈 선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자신의 스타일의 장점은 잘 살리면서 자신의 카드를 다양화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어 발해의 꿈을 테저전에 있어서 완전테란맵;으로 만들어버린 전략이라든지..엠겜 승자조 1경기 애리조나 박태민 선수와의 경기처럼 말이죠.. 암튼 다른 부분은 몰라도 지훈 선수가 전체적인 행보에 있어서도 분발하고 더욱 힘내야한다는 데에는 동감합니다.. 지훈 선수 기다리는게 아니라 좀 쉬고 있는듯한 느낌이^^; 능력이 충분히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이제 보여주셔야죠.. 점점 발전하는 지훈 선수이길 바라면서.. 화이팅!!!^^ 덧) 오타때문에 글을 계속 수정하느라서 본의아니게 순서가 바꼈네요..죄송합니다^^;
05/03/21 00:08
서지훈선수의 플레이는 맵에 따른 가장 완벽한 전략 빌드 운영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서지훈 선수가 이기면 왠지 테란맵인듯한 느낌을 줘버리죠.
반대로 임요환선수는 절대 타이밍 절대 컨트롤에 의지하기 때문에 테란이 정말 불리한 맵이지만 임요한 이였기에 이긴듯한 느낌을 주고요.
05/03/21 02:36
에...제가 서지훈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단단하고 여유롭고 그런 느낌이 아니라 가만히 있는 표정에서도 확 타오르는 것 같은 불꽃이 느껴져서인데..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른 것 같아요. 흠.
05/03/21 12:27
그러고보면 오다, 도요토미, 도쿠나가 3명의 일화가 또 있죠.
쌀을 씻은 건 오다, 떡을 찧은 건 도요토미, 손하나까딱않고 먹은 도쿠가와였던가요. 저도 서지훈 선수의 지긋함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저그전에 있어 그의 순간 판단력 또한 만만하게 봐선 안될 것 같아요.
05/03/21 12:53
^^; 미흡한 글이 또 추게로 왔네요.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에, 1~3편은 자게에 있습니다 ^^ 혹 보고싶으신 분은 자게에서 제 아이디로 검색해보세요~ 다음부터는 링크를 첨부하도록 하겠습니다^^
05/03/21 18:26
주간 리뷰에 넣어 놓고 학교에 다녀오니… 결국 다시 눈물을 머금고 지웁니다T_T;; 추게 입성 축하드립니다! 이런 글이 안 오면 뭐가 올까요^^
05/03/27 14:03
서지훈 선수의 부진(???????) 을 볼때마다
김정민 선수의 그것이 생각나는것은 저뿐인가요..... 글 잘읽었습니다. ^^ 좋은 글이네요~
05/03/27 22:59
위에나온 서지훈선수의 특성상 극강선수들이 아닌 보통의 선수들은 정말 서지훈선수를 이기는거 보기힘들더군요... 양민킬러라는 별명이 괜히있는게 아니라 보여집니다
05/03/28 01:58
극강에 약하다? 양민킬러? 이런말만큼 위험한 편견이 있을까요.
서지훈선수를 이기면 극강이고, 서지훈선수에게 지면 양민이 되는건가요? 이런말을 하기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양민'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05/03/28 09:11
우와~ 추게로 왔네요!! 축하 축하!
"너가 무슨일을 하던 상관 안해, 난 내가 하고 싶은대로만 하면 이겨..내 스타일로 상대한다.." 라고 말하는 듯 하죠..
05/03/31 23:35
일본 역사에 대해 무지하고 아직 생각이 부족한 저에겐
너무도 어려운 글이군요.. 하지만 서지훈선수의 광팬이기에 열심히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05/04/03 00:37
지금 이분사람들의 이야기를 볼수 있는 만화가 지금 출판되어서 지금 보고 있습니다 제목은 센코쿠라고 지금 4편까지 나왔는데 일본 사극이여서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05/04/03 20:04
아아.. 일본 역사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가장 재미있게 본 소설이 `대망`이라는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대하역사소설이라..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하여 부연을 덧붙이자면..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지금의 일본 혼슈의 나고야 근처)지방의 다이묘였죠.. Daydreamer님께서 말씀하셨듯 파격적이고 비상식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때 위폐에 향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하루만에 첩을 세명을 맞이하는등의 행동 등등 기묘한 행적을 보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파격적인 성격이 천하쟁패를다투는 다이묘의 대열에 합류한 이후로 거의 +적인 요소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든다면 노부나가는 다이묘가 된후로 각종 첩자와 낭인들의 자유로운 출입으로 치안이 악회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영지네의 모든 다리와 목등의 요소의 통행료 징수를 철폐시켰는데요.. 이는 곧 영지내에서의 시장의 활성화와 경제력의 성장을 의미했죠. 인재 등용에서도 그의 파격적인 성격은 잘 드러납니다. 당시 다른 영지출신 농군의 아들이였던 기노시다 도끼찌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등용, 훗날 자신의 4대 중신의 하나로까지 발탁시키죠..(조선시대 양반과 평민의 차이만큼 전국시대 일본의 무사와 평민의 차이는 컸죠..) 또 당시 전국의 다이묘들이 원교근공의 전략으로 세력을 확장한 반면, 노부나가는 자신의 영지 동쪽에 인접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동맹을 맺고 황실이 있던 교토로 진출하는 근교원공의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고요. 노부나가는 전투에 있어서 역시 파격적이였습니다. 천하쟁패에 있어서의 그의 첫 위기는 이마가와 요시모도의 교토진출에 찾아 옵니다. 현재 도쿄 서부에 위치하는 미까와, 도도우미, 스루가지방의 다이묘였던 요시모도는 2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당시 일본의 왕실이 있던 교토로 올라가는데 그 중간에 노부나가의 영지였던 오와리가 있었습니다. 대략 5:1정도의 병력비에서 노부나가는 반나절만에 이루어진 2~3천 정도의 병력을 거느린 단 한번의 요시모도의 본진 기습으로 요시모도를 전사시킵니다. 이후 `풍림화산`이란 말로 잘 알려진 다케다군과의 10여년간의 싸움이 있었는데요, 도도우미 지방의 나가시노 대전에서부터 승기를 잡고 결국 다케다를 멸망시키게 되죠..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에 있어서 2차세계대전당시 최초의 항모기동전대의 운용과 함께 세계전사에 한획을 긋는 전투입니다.. 당시 노부나가는 2만여의 기병중심의 다케다군에 대항하여 5천정도의 조총부대를 편성, 울타리로 기동력을 저하시키고 개활지에 노출된 다케다군을 거의 전멸시킵니다. 이러한 노부나가는 후에 혼슈서부지역로의 세력확장을 꾀하던 도중 4대 중신의 하나였던 아께찌 미쓰히데의 모반에 아들과 함께 살해되고 맙니다. 그의 파격적인 성격이 그자신에게 -적인 요소로 작용한 예라고 볼수있는데요.. 급하고 파격적이였던 성격의 노부나가는 그의 중신이였던 세밀하고 신중한 성격의 아께찌 미쓰히데에게 단적으로 영지교체를 명하게 됩니다. 마침 두사람의 성격의 부조화도 작용을 하여 미쓰히데는 모반을 계획하게 된것이죠. 노부나가의 사후 혼란도중에 서부전선의 총지휘자로 중신의 하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상대하고 있던 다이묘와 휴전을 맺고 급거 회군, 노부나가의 남겨진 신하들을 차례로 포섭하여 미쓰히데의 모반을 진압합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 살해후 교토를 비롯한 일본의 중심부를 장악했지만 불과 `3일천하`에 지나지 않았지요. 히데요시의 장점을 꼽자면 `지략`과 `정략`을 꼽을수 있겠네요. 노부나가 사후 대치하고 있던 상대 다이묘와의 전격적인 휴전이나, 노부나가 유신들의 포섭말고도 무력으로 굴복시키지 못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결국 자기의 중신으로 포섭한것이나, 그 외에 모리, 우에스기, 마에다, 다떼등 도쿠가와 보다야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세력을 자랑하던 다이묘들을 무력이 아닌 정략으로 휘하에 포섭하는등의 대목에서 잘 드러나죠.. 이후 히데요시는 오사카(지금의 그 오사카성..)성을 축성, 거성으로 삼고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일.. 곧 조선출병을 감행합니다. 그의 복잡했던 가족문제와 정략으로 이루어진 다이묘들의 포섭, 그리고 조선출병의 후유증등으로 인해 그의 병사후 일본 전국은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동과 서로 양분되어 전쟁을 벌이게 되죠.. 이때 동군의 총지휘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이에야스의 아버지는 앞서 언급했던 이마가와 요시모도 세력하에 있던 미까와 지방의 작은 다이묘였습니다. 이에야스의 인생을 보면 참 파란만장함과 동시에 `인내`라는 단어가 연상되는데요.. 우선 그의 조부는 가신에게 암살당합니다. 그의 생모는 그가 3~4살정도 될때 이혼을 당하고 쫒겨나고요, 그 자신은 부친이 원군을 청한대에 대한 반대급부로 6살때에 이마가와 요시모도에게 인질로 보내어 집니다. 후에 8살정도 되었을때 부친도 가신에게 암살당하지요. 이마가와 요시모도가 노부나게에게 살해된 이후 노부나가와 연합하여 다케다군과 대치하던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눈밖에난 장남에게 할복명령을 내립니다. 동맹관계였던, 그리고 노부나가의 도움이 절실했던 상황이였기 때문이지요.. 이 시기에 자신의 정실 역시 가신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이 경우는 좀 특별한게 이에야스의 정실은 이마가와 요시모도의 조카로서 이마가와를 멸망시킨 노부나가를 적대했었죠.. 이에야스의 장남은 그 정실의 아들이기도 했고.. 이마가와와 다케다는 동맹관계이자 인척관계였기 때문에 이에야스의 정실역시 바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적인 다케다와 연계가 있었고 이에야스의 장남은 그 정실의 영향을 충분히 직접적으로 받을수 있는 상황이였죠.. 노부나가는 문중의 평판과 행실이 좋은편이 못되었던 자신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장남인 그와 이에야스의 정실에대하여 탄핵을 했고 이에, 이에야스의 장남은 이에야스에게 할복명령을 받았으며, 이에야스의 정실은 때마침 가신과의 간통사건까지 겹쳐서, 분노한 가신들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장남과 정실의 타살아닌 타살도 감내하며 세력을 꾸준히 확장한 이에야스는 이후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히데요시와 대치하기도 하지만 결국 히데요시의 중신이 됩니다. 중신이 된이후 그는 히데요시의 최측근으로서, 동시에 최대의 경계대상으로서 히데요시를 보좌하게 됩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무력으로 제압하지는 못했고, 그를 포섭하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을 이에야스에게 출가시키고,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내는등 갖은 수단을 다했었으니.. 당연하겠죠.. 이에야스를 굴복시킨후 히데요시가 그때까지 황무지라고 할수있던 관동지방(지금의 일본의 수도권)으로 영토이전을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이에야스의 구영지에 자신의 최측근들을 배치시킴과 동시에 이에야의 영지 근처에 우에스기, 다떼, 가모, 사나다등의 상당한 세력의 다이묘들을 배치시킨것은 히데요시가 얼마나 이에야스를 경계했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동시에 위에서 영지교체를 명받고 참지못해 모반을 일으킨 아께찌와는 달리 이에야스의 인래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히데요시의 사후 동군을 지휘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뒤에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일하게 되고요.. 세키가하라 전투이후 몇년후에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세우게 됩니다. 도쿠가와 막부, 혹은 에도막부라 불리우는 이 체제는 이후 메이지유신까지의 200년 가량 유지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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